빛과 철, 사실을 알게 됐는데 왜 진실은 더 멀어지는 걸까
영화는 107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아직 상영 중입니다
염혜란 배우 때문에 봤습니다.
솔직히 영화의 내용보다는 배우에 대한 기대가 먼저였습니다. 염혜란이라는 이름 하나면 적어도 연기 때문에 실망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정작 배우보다 다른 것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질문입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내리면 그 답 때문에 새로운 질문이 생기고,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전까지 내렸던 판단마저 의심스러워지는 겁니다.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머릿속에서 혼자 토론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도 저고, 반대하는 사람도 저입니다. 문제는 양쪽 이야기가 다 그럴듯하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영화가 좋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이야기도 깔끔하게 끝나는 작품이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고, 감동도 받고, 잘 봤다는 생각으로 극장을 나섭니다. 그것도 영화가 줄 수 있는 충분히 좋은 경험이죠.
그런데 가끔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제 안에서는 끝나지 않는 작품을 만납니다.
『빛과 철』이 그랬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참 편리한 두 단어
배종대 감독의 『빛과 철』은 한 번의 교통사고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희주의 남편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영남의 남편은 2년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고의 가해자는 희주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영남은 피해자의 가족이고, 희주는 가해자의 가족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주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영남과 다시 마주치고, 영남의 딸 은영이 그날의 이야기에 개입하면서 이미 정리된 줄 알았던 사건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때부터 영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사건을 더 잘 이해하게 되어야 할 텐데, 오히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건을 이해할 때 상당히 단순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누가 잘못했는가.
누가 피해를 입었는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물론 중요한 질문입니다. 특히 법적 책임을 가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잘못과 다른 사람의 피해가 밝혀졌다고 해서, 그 사건에 관계된 모든 사람의 삶까지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그 선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모두가 상처받았으니 모두가 똑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책임의 크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잘못이 있었다면 당연히 따져야 합니다.
다만 책임을 가리는 일과 한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 차이를 집요하게 건드린다고 느꼈습니다.
사실을 안다고 진실을 아는 건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생각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말일까요?
일상에서는 별다른 구분 없이 사용하지만, 『빛과 철』을 보고 있으면 두 단어 사이에 생각보다 넓은 간격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령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군가 죽었고 누군가는 의식을 잃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날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각각의 사람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의 사실은 또 다른 사실을 필요로 합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면 이번에는 누군가의 말이 걸립니다.
말 자체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전부를 이야기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사실을 감추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말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 복잡합니다.
더 답답한 건 그 모든 조각을 모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다 해도,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남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의도를 추측합니다.
그런데 내 행동의 이유조차 스스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고, 분명 옳다고 믿었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간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냈습니다.
과연 그 안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명쾌한 진실이 있을까요?
저는 영화를 보는 동안 계속 판단을 바꿨습니다.
이 사람이 잘못했구나 싶다가도, 잠시 후에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려니 그것 역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뭔가 빠뜨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좋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염혜란이라는 배우가 보여 주는 것
염혜란 배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니까요.
저는 염혜란 배우가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감정을 표현할 때 특히 좋습니다.
이 영화에서 연기하는 영남이라는 인물도 그렇습니다.
남편은 2년째 의식이 없습니다.
사고는 과거에 일어났지만, 영남에게 그 사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2년은 지나간 시간이겠지만, 영남에게는 같은 문제를 안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시간입니다.
여기서 저는 사고 이후의 삶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큰 사고가 발생하면 그날의 상황에 집중합니다. 누가 다쳤고, 누가 죽었고, 원인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뉴스가 끝난 다음 날에도 누군가는 병원에 가야 합니다.
그다음 날에도 가야 하고, 그다음 달에도 가야 합니다.
사건은 한순간에 발생하지만 그 결과를 감당하는 일에는 끝나는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염혜란 배우는 바로 그런 시간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영남의 감정이 반드시 친절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도 있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점이 좋았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자신의 인물을 무조건 좋아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데도 이해하고 싶게 만드는 일이겠죠.
염혜란 배우가 그 어려운 일을 해냅니다.
그리고 김시은 배우의 희주 역시 인상적입니다.
희주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남편을 잃은 사람으로 슬퍼할 수도 없습니다. 사고에 붙은 가해자라는 이름이 남겨진 사람의 삶에도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새로운 사실이 등장한다면 어떨까요.
그 사실은 구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견뎌 온 시간을 송두리째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박지후 배우가 연기한 은영까지 포함하면 세 사람은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 인물 중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끝내 쉽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인물들을 애매하게 만들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인간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떨까요?
영화를 다 보고 가장 무서웠던 생각은 따로 있습니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많이 일어날까?
교통사고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대개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내용을 통해 사건을 접합니다.
기사 한 편, 짧은 영상, 누군가의 진술, 인터넷에 올라온 글 몇 줄.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판단합니다.
이 사람이 잘못했네.
저 사람은 억울하겠네.
저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
저도 그렇습니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판단부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모른다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결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현실의 사건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겁니다.
처음 알려진 내용과 나중에 드러난 내용이 다를 수도 있고, 모두가 사실을 말했는데도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건에 숨겨진 반전이 있다고 의심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도 위험한 태도겠죠.
분명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을 들이밀며 고통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빛과 철』을 보며 느낀 건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의 범위와, 그 사건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확신은 과연 비례하고 있을까?
대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는 건 얼마 없는데 확신은 넘칩니다.
인터넷 댓글 몇 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것만큼이나, 빨리 판단을 끝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빛과 철』은 그 편리한 습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대답하지 않는 영화가 남기는 것
저는 모든 작품이 관객에게 교훈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도 있고, 즐겁게 할 수도 있고, 잠깐 현실을 잊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보다 보고 난 다음에 생각할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겁니다.
『빛과 철』은 그중에서도 꽤 지독한 편입니다.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수록 인물이 복잡해지고, 인물을 이해하려고 할수록 사건을 다시 보게 됩니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그날의 진실을 완벽하게 알게 된다면, 남겨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알면 억울함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밝혀질 수도 있고, 오래 짊어졌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눈을 뜨는 것도 아닙니다.
진실은 과거에 대한 설명을 바꿀 수 있어도, 과거가 남긴 결과까지 없애 주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그토록 진실을 알고 싶어 할까요.
어쩌면 진실이 고통을 끝내 줄 것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라도 알고 싶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마저 알 수 없다면 견뎌 온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막막할 테니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또 질문이 생깁니다.
진실을 아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실을 밝히는 일은 언제나 옳은 일일까요?
그렇다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감추는 일이 정당해질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빛과 철』을 보고 난 뒤에는 그 모른다는 상태가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는 편이 조금은 더 정직한 태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목도 오래 남습니다.
빛은 무언가를 보이게 하지만, 빛이 닿았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철은 단단하지만 충돌 앞에서는 구겨지고 망가집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가 믿는 사실을 단단하게 붙잡고 살아가다가, 예상하지 못한 진실과 부딪히는 순간 지금까지의 삶이 흔들리기도 하니까요.
물론 이건 제가 영화에 멋대로 붙인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는 이유가 언제나 감독이 의도한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는 아니니까요.
『빛과 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건, 영화를 보고 난 제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자격은 어디까지인지.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며칠이 지나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답을 찾아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가끔은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편이, 섣불리 대답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영화는 107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아직 상영 중입니다.
종료 버튼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뭐, 굳이 누를 생각도 없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