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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사람 하나를 살리는 데 필요한 말들

무섭도록 어둡고, 미치도록 따뜻한

2026년 9월 16일운영자 개인 의견

좋아하는 드라마를 묻는 질문에는 의외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재미있게 본 작품은 많습니다. 밤을 새워 본 드라마도 있고, 마지막 회가 끝나는 게 아쉬워 일부러 며칠 미뤄둔 작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 드라마’라는 말을 붙이려면 조금 달라집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다시 봐도 좋아야 하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새롭게 보여야 하며, 무엇보다 그 작품을 좋아했던 과거의 나까지 민망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나의 아저씨』는 꽤 안전한 답입니다.

2018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드라마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섭도록 어둡고 미치도록 따뜻한 드라마.’

최근 다시 봤습니다.

그리고 또 울었습니다.

참 발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곳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 볼 때는 박동훈과 이지안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아팠다면, 다시 볼 때는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별것 아닌 말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착하다.”

“용감하다.”

“고맙다.”

“파이팅.”

글자로만 떼어놓으면 이게 무슨 명대사인가 싶습니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 안에서는 이런 평범한 말들이 사람을 살립니다.

아마 이 드라마를 오래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의 사람들은 대부분 어딘가 망가져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버텨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더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고, 이뤘다가 추락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 돈이 없는 사람, 가족 때문에 괴로운 사람,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 한 동네에 모여 삽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드라마는 그들을 실패자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묻습니다.

그래서 뭐?

좀 망가지면 어떤가.

인생에 금이 갔다고 사람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제가 다시 보면서 특히 좋아진 인물이 최유라였습니다. 한때 잘나가던 영화감독이었던 박기훈은 망했습니다. 그런데 유라는 그런 기훈을 보면서 오히려 안심합니다. 망한 사람이 멀쩡하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웃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망해도 괜찮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이 말은 생각보다 큰 위로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나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직장, 직함, 돈, 집, 학벌, 평판, 가족, 성공.

분명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을 가진 내가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중 하나에 금이 가면 내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박동훈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견디지 못한다고.

그런데 『나의 아저씨』가 끝내 보여주는 풍경은 조금 다릅니다.

기둥 몇 개 무너져도 사람은 삽니다.

심지어 웃기도 합니다.

그게 참 좋았습니다.

어른의 친절은 때로 ‘모른 척’이다

처음 봤을 때보다 다시 봤을 때 훨씬 크게 들어온 대사가 있습니다.

“모른 척해줄게.”

『나의 아저씨』에는 비밀이 많습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고, 알려지는 순간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젊을 때는 가까운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솔직해야 친한 것이고, 숨기는 것이 없어야 진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면 조금 달라집니다.

굳이 묻지 않는 것도 친절이고, 알아도 모르는 척해주는 것도 의리가 됩니다.

박동훈이 말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욕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당사자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어른들에게는 모든 걸 알려주는 것이 우정이 아니라, 때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의리고 예의라고.

저는 이게 참 좋았습니다.

세상에는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덮어주는 편이 나은 순간도 있습니다.

물론 잘못을 은폐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흉터가 있고,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그 흉터를 마음대로 들춰볼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지안은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동훈은 약속합니다.

네가 모른 척해 줬듯 나도 모른 척해 주겠다고.

저는 『나의 아저씨』에서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해결해주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네가 숨기고 싶은 것을 함부로 들추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드라마의 위로는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요란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 쉽다

이지안의 대사 중 오래 남는 말이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쉬워.”

참 지독한 말입니다.

동시에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착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정직해야 한다고 하고, 남을 배려해야 한다고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는 한 번 더 들어갑니다.

그 사람이 착하게 살 수 있는 형편이었는지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지안에게 세상은 처음부터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멀쩡한 삶의 기준을 들이대고 왜 너는 남들처럼 살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동훈은 지안을 심판하기 전에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저는 이 말을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면죄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을 그의 최악의 순간 하나로만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람 하나를 제대로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왜 거기까지 밀려났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알게 되면 함부로 미워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서로의 인생을 고쳐주지 않습니다.

대신 알아줍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다는 듯이.

그래서 ‘고맙다’가 명대사가 된다

이번에 다시 보면서 명대사를 따로 적어봤습니다.

그런데 다 적고 보니 조금 웃겼습니다.

“고맙다.”

“착하다.”

“좋다.”

“용감하다.”

이런 것까지 적어놨습니다.

누가 보면 대사를 고르다 귀찮아서 아무 말이나 받아 적은 줄 알겠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저 말들이 나오는 순간의 무게를.

『나의 아저씨』는 화려한 문장보다 평범한 말에 힘을 싣는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 말을 하기 전까지 인물들이 견뎌온 시간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맙다”라는 세 글자 뒤에 16회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픕니다.

특히 지안에게 “용감하다”고 말하는 동훈이 좋았습니다.

지안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세상은 아마 지안을 가난한 아이, 불쌍한 아이, 위험한 아이 정도로 봤을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전혀 다른 이름을 붙여줍니다.

용감한 사람.

사람은 가끔 타인이 불러준 이름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갚는 것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서는 결국 이것입니다.

행복해도 된다는 허락.

이 작품의 인물들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 행복에 인색합니다.

가족 때문에 참습니다.

과거 때문에 참습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참습니다.

이 나이에 뭘 새로 시작하느냐며 참습니다.

내가 조금 희생하면 다른 사람이 편할 거라며 또 참습니다.

그러다 박상훈이 동훈에게 화를 냅니다.

희생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고.

너부터 행복하라고.

뻔뻔하게 너만 생각해도 된다고.

참 이상합니다.

행복하라는 말이 왜 이렇게 어렵게 들릴까요.

아마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행복을 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행복할 자격이 생기고, 잘못한 것이 없어야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킨 다음에야 내 행복을 생각해도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차례가 영영 안 옵니다.

봉애 할머니는 지안에게 말합니다.

모든 인연이 귀하니 갚아야 한다고.

그리고 갚는 방법도 알려줍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저는 이게 『나의 아저씨』가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친절을 반드시 그 사람에게 되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살아남으면 됩니다.

잘 살면 됩니다.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친절을 건네며 살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아무것도 아니야

이 드라마에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참 묘한 위로입니다.

힘든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건 쉽습니다.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것도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사람에게 그런 말은 가끔 잔인합니다.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니까요.

『나의 아저씨』는 조금 다릅니다.

괜찮아질 거라고 장담하기보다, 지금 네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사실 인생 전체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쪽팔린 것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망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박동훈 자신이 그 말을 믿게 됩니다.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저는 그 장면이 좋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해주던 위로를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도 해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처음 봤을 때 『나의 아저씨』는 저에게 아주 슬픈 드라마였습니다.

다시 보니 조금 다릅니다.

슬픈 드라마라기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상처가 없어지는 이야기도 아니고, 과거가 지워지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기적처럼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상처를 가진 채 밥을 먹고, 출근하고, 술을 마시고, 웃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 정도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마를 처음 본 뒤 손디아의 「어른」과 정승환의 「보통의 하루」를 정말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작품에서 빠져나오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봤는데 또 울었습니다.

아마 언젠가 또 볼 것 같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른 대사가 눈에 들어오겠죠.

예전에는 지안이 보였고, 이번에는 동훈의 말들이 들렸으니,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작품은 그렇게 늙지 않고 관객 쪽을 늙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는 아직도 제 인생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길게 이야기하고 난 뒤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말은 의외로 별것 없습니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요.

행복하자.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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