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 불안을 관객에게서 빌려 쓰는 영화
사건이 없는데 내내 불안했다면, 그 불안은 영화의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원래 제 것이었을까요.
천우희라는 배우에게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크게 소리치지 않아도 화면에 사람을 붙잡아 둡니다. 사건이 별로 없어도 보고 있게 만들고, 인물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한공주》에서도 그랬고, 《어느날》에서도 그랬습니다.
흔히 어떤 작품을 두고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데 천우희는 정말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배우입니다.
배우 한 사람이 영화의 밀도를 혼자 끌어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티고》도 그렇습니다.
다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천우희가 있어서 좋은 영화라기보다,
천우희가 없었다면 제가 이 영화를 끝까지 봤을까 싶은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칭찬입니다.
절반 정도는요.
내내 불안했습니다
《버티고》를 한 줄로 평가하라고 하면 저는 이렇게 쓰겠습니다.
내내 불안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흔히 불안해할 만한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누가 죽을 것 같은 스릴러도 아니고.
범인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시한폭탄이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고층 빌딩에서 일하는 계약직 여성 서영.
회사에서 비밀리에 만나고 있는 남자.
그리고 빌딩 밖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또 다른 남자.
크게 말하면 이게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114분 동안 계속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고.
지금 아무 일도 없는데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유를 제 경험에서 찾았습니다.
영화 속에 비밀 사내연애가 나오니까요.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네.
있습니다.
자세한 건 묻지 마세요.
그래서 ‘내가 저 상황을 알아서 괜히 더 불안한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사내연애와 별 상관없는 장면에서도 불안했습니다.
복도에서도.
엘리베이터에서도.
사무실에서도.
그냥 천우희가 걷고 있을 뿐인데 마음 한쪽이 계속 서늘합니다.
그때부터 궁금해졌습니다.
이 영화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불안을 보여주지 않고 빌립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저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버티고》는 불안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불안을 관객에게서 빌려 쓰는 영화입니다.
보통 스릴러나 공포영화는 불안의 재료를 영화가 준비합니다.
누군가 따라옵니다.
문이 잠깁니다.
전화가 옵니다.
범인이 숨어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관객은 영화가 준비한 이유 때문에 불안해집니다.
불안의 원인이 화면 안에 있습니다.
《버티고》는 반대입니다.
영화가 주는 재료는 굉장히 적습니다.
높은 빌딩.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
비밀 관계.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
조금씩 흔들리는 카메라.
그리고 회사 안에서 어디에도 완전히 기대지 못하는 여자 하나.
이 정도만 깔아놓습니다.
그다음에는 기다립니다.
관객이 자기 안에서 뭔가를 꺼낼 때까지.
저는 비밀연애의 기억을 조금 꺼냈을 겁니다.
누군가는 계약직이라는 단어에서 자기 경험을 꺼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회사라는 공간 자체가 불안했을 겁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사람에게는 유리창 하나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삶이 조금 흔들리고 있는 시기에 이 영화를 봤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그걸 가져다 씁니다.
그래서 똑같은 장면을 보는데도 사람마다 불안한 이유가 다를 것 같습니다.
영화가 불안의 내용까지 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불안해질 수 있는 공간만 만들어 놓습니다.
나머지는 관객이 채웁니다.
이 방식은 꽤 영리합니다.
동시에 아주 위험합니다.
주머니가 비어 있으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관객에게서 뭔가를 빌리는 영화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관객이 빌려줄 게 없으면 어떡하느냐는 겁니다.
영화가 사건을 직접 제공하지 않는 대신 관객의 기억이나 불안을 가져다 쓴다면, 관객에게 비슷한 감정이 하나도 없을 때는 화면에서 정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114분은,
그냥 114분입니다.
상당히 깁니다.
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단점도 그겁니다.
너무 깁니다.
30분 정도만 덜어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희한해서 짧게 이어지면 긴장감인데, 너무 오래 이어지면 익숙해집니다.
사람이 적응합니다.
처음에는 흔들리는 화면만 봐도 ‘뭔가 이상하다’ 싶다가, 한 시간쯤 지나면,
“네, 흔들리는군요.”
하게 됩니다.
빌려온 감정을 너무 오래 쓰면 이자가 붙습니다.
나중에는 원금보다 이자가 커집니다.
그래서 영화가 느리고 긴 게 반드시 나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버티고》의 114분은 제게 분명 조금 과했습니다.
영화가 가진 정서보다 러닝타임이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핸드헬드는 조금 친절했습니다
후반부에 천우희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핸드헬드로 번갈아 따라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흔들립니다.
불안정합니다.
보고 있으면 이제는 영화가 거의 직접 말합니다.
“지금 이 사람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여기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전까지 《버티고》가 좋았던 이유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갑자기 감정을 눈앞에 들이밉니다.
말하자면 그동안 남의 주머니에서 조용히 돈을 빌려 쓰던 사람이 갑자기 계산서를 들고 나타난 느낌입니다.
‘봐요, 불안한 영화 맞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았어도 됐습니다.
이 영화는 말을 안 할 때 더 무서웠습니다.
정확히 설명하지 않을 때 더 좋았습니다.
빈 공간에 제가 알아서 뭔가를 넣도록 두는 편이 이 작품과 더 잘 어울렸습니다.
제목은 인정합니다
제목은 꽤 잘 지었습니다.
《버티고》.
영어로 Vertigo.
현기증입니다.
당연히 히치콕의 《현기증》도 떠오릅니다.
저는 히치콕 영화 중에서는 《현기증》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연결됐습니다.
고층.
현기증.
불안.
균형을 잃는 사람.
그런 이미지들이 겹칩니다.
게다가 한국어로 소리 내면 ‘버티고’에는 ‘버티다’라는 말까지 묘하게 들러붙습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고.
계약직으로 버티고.
사랑을 붙잡고 버티고.
회사에서 버티고.
삶이 기울어져도 그냥 버팁니다.
영화 속 서영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작명 센스는 인정합니다.
다만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하면 재미있는 차이가 생깁니다.
히치콕은 현기증을 관객에게서 빌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직접 줬습니다.
카메라와 편집과 이야기로 관객 머리를 흔들어버렸습니다.
《버티고》는 훨씬 수동적입니다.
공간을 만들어놓고 관객이 자기 불안을 들고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
둘 다 현기증인데,
하나는 만들어내고,
하나는 끌어냅니다.
저는 그 차이가 이 영화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은 사랑으로 모든 걸 덮은 걸까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 ‘결국 사랑으로 다 무마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조금 과한 해석 같았습니다.
서영이 마지막에 얻은 것이 단순히 새로운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중요한 건 사랑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방향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화 내내 버팁니다.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냥 오늘 하루를 견딥니다.
계약직도.
관계도.
자기 마음도.
버티는 데 모든 힘을 씁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처음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방향을 갖습니다.
그게 꼭 연애여야 했느냐는 질문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애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앞의 모든 감정을 사랑으로 봉합했다고 보는 건 조금 억울합니다.
저는 결말이라기보다 방향 제시로 봤습니다.
아직 도착한 것도 아닙니다.
이제 어딘가로 가보고 싶어진 것뿐입니다.
버티는 사람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꽤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결국 영화를 버티게 한 건 천우희였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천우희.
이 영화를 제가 끝까지 본 가장 큰 이유입니다.
큰 사건이 없는 영화에서 배우는 굉장히 불리합니다.
사건이 배우를 끌고 갈 수 없으니까요.
폭발도 없고.
범죄도 없고.
빠른 전개도 없습니다.
그러면 배우가 화면을 채워야 합니다.
《버티고》는 특히 그렇습니다.
관객이 자기 불안을 꺼내서 영화에 얹을 때까지 화면 안에서도 뭔가 계속 살아 있어야 합니다.
천우희가 그걸 합니다.
표정이 크지 않습니다.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불안합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데 이미 혼자인 사람 같습니다.
회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데 배경과 조금 분리돼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배우는 그런 고립을 굉장히 잘 표현합니다.
그래서 사건이 없어도 화면 안에서는 계속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천우희라는 사람이 사건입니다.
그게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높게 평가한 부분입니다.
동시에 영화 입장에서는 조금 민망한 칭찬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가 잘해서 영화가 살아났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배우를 빼면 영화가 상당히 위험했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저는 천우희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굉장히 낮게 평가했을 것 같습니다.
끝까지 봤을지도 자신 없습니다.
114분을 견딜 이유가 많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천우희에게는 또 한 번 감탄했고,
영화에는 또 한 번 묻고 싶었습니다.
배우가 이렇게까지 혼자 버텨야 했나.
그래서 추천하느냐고 하면
이건 조금 애매합니다.
천우희를 좋아한다면 볼 만합니다.
다만 길다는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천우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럼 정말 애매합니다.
사건이 많은 영화도 아니고.
이야기가 강한 영화도 아니고.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고 가는 작품도 아닙니다.
본인이 영화에 가지고 들어갈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있으면 묘하게 불안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없으면 아주 긴 시간 동안 한 여자가 흔들리는 걸 지켜보다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꽤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자기 이야기를 봤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였냐고 할 겁니다.
둘 다 이상한 반응은 아닙니다.
애초에 영화가 절반만 준비하고 나머지 절반은 관객에게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저는 꽤 많이 가져갔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내내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가장 강하게 남은 건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천우희였습니다.
결국 《버티고》는 제게 그런 영화입니다.
불안은 제 걸 빌려 썼고,
러닝타임은 지나치게 오래 빌려 갔고,
그 시간 동안 화면을 버티고 있던 사람은 천우희였습니다.
천우희를 안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이 영화는 긴 영화입니다.
천우희를 좋아하신다고요?
그래도 긴 영화입니다.
다만,
버틸 수 있는 긴 영화입니다.
…제목이 그래서 《버티고》였나 싶기도 합니다.
### p.s.
이 영화는 천우희의 독백으로 시작해 그녀의 독백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오늘도 흔들렸지만 어떻게든 견뎌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난 계절을 돌아보면서, 이제는 어딘가로 올라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 있는 114분이 결국 제목 그대로입니다.
버티기.
처음에는 견디는 게 목적이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움직이고 싶어집니다.
저는 그 변화 하나만큼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데 정말 오래 버텨야 한다는 거지만요.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