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버려 종양군, 웃어도 되냐고 묻기 전에 그녀가 먼저 웃었습니다
시한부 이야기가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었는데, 가볍게 만든 사람이 본인이더군요
시한부 환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많이 웃어도 되나.
《꺼져버려 종양군》을 보는 동안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이런 소재를 다루는 영화에는 어느 정도 준비된 자세가 있습니다. 관객도 마음을 조금 무겁게 먹고 들어갑니다. 언제 슬픈 장면이 나올지 알고 있고, 어느 순간부터 음악이 잔잔해지면서 눈물을 요구할지도 대충 예상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작부터 그 예상을 비껴갑니다.
장례식이 나오는데 웃깁니다.
병원에 가는데 웃깁니다.
주인공은 아픈데 계속 웃깁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가까워지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유쾌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이런 주제를 이렇게 가볍게 다뤄도 되는 걸까.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웃겨도 되는 걸까.
그런데 영화를 알고 나니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웃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할 상대가 이미 먼저 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이 그녀를 웃긴 사람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꺼져버려 종양군》은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주인공의 실제 모델은 중국의 만화가 슝둔입니다.
그녀는 비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은 뒤 자신의 투병 생활을 만화로 그렸습니다. 병원 생활도, 항암 치료도, 머리가 빠지는 일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도 전부 자기 방식으로 바꿔 그렸습니다.
그 작품의 제목이 《꺼져버려 종양군》입니다.
병을 무겁고 장엄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종양에게 말을 걸고, 싸움을 걸고, 농담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영화가 실존 인물의 비극을 가져와 억지로 코미디로 만든 게 아닙니다.
애초에 당사자가 자기 병을 그렇게 다뤘습니다.
그러니까 관객이 웃는 건 그 사람의 비극을 구경하며 웃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 사람이 건넨 농담에 반응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의 가벼움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였는데,
나중에는,
‘그래서 이렇게 만든 거구나.’
가 됩니다.
불쌍하게 만들지 않는 게 오히려 중요합니다
주인공 슝둔은 초긍정적인 사람으로 나옵니다.
아프고,
불안하고,
죽음이 멀지 않은 상황인데도 영화는 그녀를 계속 밝게 그립니다.
그렇다고 마냥 철없는 사람처럼 만들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영화가 그녀를 불쌍한 사람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관객에게 연민을 요구하는 겁니다.
얼마나 아픈지 보여주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강조하고,
얼마나 젊은 나이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계속 상기시키면 됩니다.
그러면 관객은 어렵지 않게 웁니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 가면 슝둔이라는 사람은 사라집니다.
남는 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젊은 환자’라는 설명뿐입니다.
《꺼져버려 종양군》은 그걸 피합니다.
아픈 사람보다 웃기는 사람을 먼저 보여줍니다.
환자보다 만화가를 먼저 보여줍니다.
죽어가는 사람보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더 오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짠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슝둔이 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영화가 그렇게 밀어붙여서라기보다 관객이 이미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꽤 큽니다.
그녀의 상상력은 사실 진통제에 가깝습니다
영화의 웃음 가운데 상당수는 슝둔의 상상에서 나옵니다.
현실에서는 병원 침대에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장르가 바뀝니다.
좀비 영화가 되고,
무협 영화가 되고,
멜로드라마가 되고,
한순간에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갑니다.
그러다 갑자기 《별에서 온 그대》의 OST였던 〈You Are My Destiny〉까지 등장합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엉뚱하게 조금 뿌듯했습니다.
한국 드라마 한 편이 중국에서 얼마나 크게 사랑받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확인하는 기분이었거든요.
두 배우가 한국어까지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발음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노력은 충분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상상 장면들을 단순히 코미디 장치라고만 보면 조금 아깝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게 슝둔이 병을 견디는 방식처럼 보였습니다.
현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
진단 결과를 없앨 수도 없고,
항암 치료를 상상으로 취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현실 위에 자기만의 화면을 하나 더 씌웁니다.
아픈 병원은 갑자기 영화 세트가 되고,
답답한 상황은 한 편의 개그가 되고,
죽음은 그냥 두려워해야 하는 것에서 한 번 놀려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뀝니다.
만화가가 현실을 견디는 방식답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바꾸지 못하니 세상을 그리는 방식을 바꿉니다.
저는 그 상상력이 일종의 진통제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벼운 사람이라서 웃은 게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슝둔이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밝았던 것도 아니고,
끝까지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에 웃었던 것도 아닙니다.
알면서 웃은 겁니다.
그래서 더 강합니다.
죽음을 몰라서 웃는 건 낙관입니다.
죽음을 알면서도 웃는 건 선택에 가깝습니다.
《꺼져버려 종양군》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계속 농담을 합니다.
그런데 그 농담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는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관객은 알고 있고,
주인공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웃음이 현실을 지우지는 못합니다.
잠깐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이 영화가 슬프면서도 슬프기만 하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가볍기만 하지 않은 이유가 그겁니다.
바이바이허는 처음 봤는데 기억에는 제대로 남았습니다
바이바이허는 이 작품에서 처음 본 배우였습니다.
보고 나서 필모그래피까지 찾아봤는데, 역시 제가 본 작품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하나로는 충분했습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꽤 잘 살립니다.
이 역할은 조금만 잘못하면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늘 밝고,
말이 많고,
상상력이 넘치고,
병에 걸렸는데도 계속 활기찹니다.
잘못하면 억지 긍정처럼 보입니다.
‘이렇게까지 밝을 필요가 있나’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이바이허는 그 밝음을 꽤 자연스럽게 붙잡습니다.
특히 슬퍼야 할 장면에서도 사람을 바로 울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중에 감정이 들어옵니다.
저는 이런 연기가 좋았습니다.
슬픔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그 사람이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오래 보여주는 방식.
그래야 마지막에 사람이 사라졌을 때 빈자리가 생깁니다.
오언조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반면 오언조는 제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배우이고 매력도 있는 배우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감정이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배역의 한계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에너지가 슝둔에게 집중됩니다.
상상 장면도 그녀의 것이고,
웃음도 그녀에게서 나오고,
관객이 따라가야 할 감정 역시 그녀 쪽에 있습니다.
그 옆에 있는 의사가 화면을 장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캐릭터 자체가 상대적으로 평평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은 감안합니다.
그래도 아쉬웠습니다.
배역 탓이 있다는 것과, 제가 별로였다는 건 동시에 성립할 수 있으니까요.
스물아홉 살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
영화 초반 슝둔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비슷한 나이에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전화기를 만들었던 사람,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
세상을 뒤흔든 영화를 만든 사람,
새로운 컴퓨터를 내놓았던 사람.
그리고 자기 차례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스물아홉에 무언가를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웃기는 장면처럼 지나갑니다.
하지만 실제 슝둔의 삶을 알고 나면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그녀는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록에 들어갈 시간은 없었던 걸까요.
저는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전화기를 만든 사람도 있고,
소설을 쓴 사람도 있고,
영화를 만든 사람도 있고,
컴퓨터를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죽음을 웃음으로 그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수백만 명이 읽었습니다.
책이 됐고,
영화가 됐습니다.
중국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출품작으로 선택할 정도의 작품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애초에 그녀가 생각했던 방식과는 달랐겠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이름을 남겼습니다.
위인이 된다고 꼭 무언가를 발명해야 하는 건 아니었나 봅니다.
죽는 법을 가르친 영화라는 말은 조금 다릅니다
다만 저는 이 영화를 ‘잘 죽는 법’을 알려주는 영화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부르면 이상하게 죽음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집니다.
제가 보기에는 반대였습니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여준다기보다,
죽음을 알게 된 뒤에도 어떻게 계속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을 만나고,
농담하고,
상상하고,
좋아하고,
후회하고,
또 하루를 보냅니다.
죽음이 삶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못합니다.
그게 슝둔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먹고,
웃고,
친구와 이야기하고,
누군가를 좋아합니다.
인생의 결말을 알게 됐다고 해서 그날부터 결말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후회
영화에서 오래 남은 말 중 하나는 행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하면 며칠 정도 후회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훨씬 오래 후회할 수 있다는 식의 말입니다.
이 문장은 그냥 가져다 놓으면 흔한 자기계발 문장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슝둔이 말하면 조금 달라집니다.
그 사람에게 시간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하면 되지.’
라는 말에서 그 ‘나중’이 실제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동하라는 말이 가벼운 충동 권장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처럼 들립니다.
언젠가가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하고 싶은 말을 미루지 않는 것.
가능하면 오늘 한 번 해보는 것.
이 영화에서 긍정은 그런 쪽입니다.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믿는 긍정이 아닙니다.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도 오늘을 쓰겠다는 쪽입니다.
장례식에서 결국 조금 울었습니다
영화는 장례식으로 시작하고,
그 장면부터 웃깁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당연히 처음과 같은 기분으로 볼 수 없습니다.
저도 결국 조금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눈물도 아주 무겁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전체가 이미 슬픔을 다루는 방법을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울더라도 오래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끝까지 슝둔답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적지 않겠습니다.
그건 영화를 보는 쪽이 낫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조금 더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게 반드시 음울한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있었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는 것도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꽤 현실적인 상상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라면 그런 생각마저 너무 심각하게만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웃음이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소재로 이렇게 많이 웃겨도 되는가.
저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이 영화에서는 그래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슝둔에게 웃음을 입힌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슝둔이 먼저 자기 병을 웃음으로 바꿨습니다.
관객이 할 일은 그 사람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농담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부터 다르게 느껴집니다.
《꺼져버려 종양군》.
아주 무서운 것을 상대로 붙인 제목치고는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장난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장난스러움 자체가 이 사람의 방식이었습니다.
무서운 걸 무섭다고만 부르지 않는 것.
그래야 잠깐이라도 그것보다 위에 설 수 있으니까요.
저도 제 스물아홉을 생각해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괜히 자기 나이도 돌아보게 됩니다.
스물아홉에 나는 뭘 했지.
생각해 봤습니다.
위인 목록에 들어갈 만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뭐,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슝둔이 남긴 것 가운데 제게 더 현실적으로 와닿은 건 거창한 업적보다 ‘하루에 한 걸음’이라는 쪽이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전화기를 발명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를 찍을 수도 없고,
세상을 바꿀 컴퓨터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미뤄둔 말을 하거나,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연락하거나,
쓰고 싶었던 글을 쓰거나,
하던 일을 한 칸 앞으로 옮기는 정도.
그렇게 보면 오늘 제 한 걸음은 이 글이겠습니다.
대단한 업적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 줄 더 왔습니다.
슝둔이 보면 그것도 일단 해놓고 보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