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너는 여전하고 우리는 대단하다
둘 다 칭찬처럼 들리는데, 이상하게 둘 다 서글픕니다.
《소공녀》의 초반에는 쌀이 새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소가 쌀자루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자루에서 쌀알이 계속 흘러내립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데도 그대로 걷습니다. 집에 도착하고 나면 손에 남은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가난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장면이 남았습니다.
왜 무게가 줄어드는 걸 몰랐을까.
분명 처음보다 가벼워졌을 텐데요.
아마 등에 지고 있는 다른 것들이 더 무거웠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것도 비슷합니다.
돈이 새고, 시간이 새고, 사람이 빠져나가고, 한때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씩 없어지는데 정작 그 순간에는 잘 모릅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덜 행복해졌다고 해서 바로 알아채는 사람은 드뭅니다.
알 수는 있습니다.
대개 나중에.
《소공녀》는 어쩌면 그 ‘나중에’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집을 잃고, 누군가는 자기를 잃습니다.
누가 더 많이 잃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집 대신 담배와 위스키
새해가 되자 월세가 오르고 담뱃값이 오르고 위스키값도 오릅니다.
그런데 미소가 받는 돈은 그대로입니다.
돈이 부족하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담배를 줄이고, 술을 끊고, 취미를 포기한 다음에야 집을 생각할 겁니다.
미소는 반대로 합니다.
집을 포기합니다.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처음 보면 이상합니다.
아니, 집이 먼저 아닌가.
살 곳부터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대부분도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조금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집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는 건 누가 정했을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집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멋있는 말을 붙여도 주거가 불안정한 삶은 고됩니다. 미소의 선택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저도 집과 위스키 중 하나를 고르라면 집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담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더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선택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게 됐을까.
어떤 걸 좋아했는데 비용이 올라 포기했고, 어떤 사람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없어 멀어졌고, 어떤 일을 하고 싶었는데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접었을 겁니다.
그런 선택을 수도 없이 해놓고도 이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미소가 이상한 게 아니라 저는 너무 익숙하게 포기하는 사람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쌀이 새는데도 모르는 사람처럼요.
그 사랑 참 염치없다
집을 포기한 미소는 옛 친구들의 집을 찾아갑니다.
한때 함께 음악을 하던 사람들이고, 젊었던 시절을 공유했던 사람들입니다.
미소는 그들의 집을 하나씩 돌며 잠시 머뭅니다.
그리고 갈 때마다 계란 한 판을 들고 갑니다.
왜 하필 계란 한 판이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냥 가격이 적당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판이 서른 개라는 사실이 자꾸 눈에 걸립니다.
이 영화 속 사람들이 서른 언저리에 서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젊다고 하기에는 이미 현실의 계산법을 너무 많이 배웠고, 그렇다고 완전히 늙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버리지 못한 것들이 있는 나이.
물론 영화가 “계란 한 판은 서른 살을 상징합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정답을 꼭 하나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소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극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
맞는 말입니다.
미소는 염치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린 것까진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의 결과로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 친구들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결혼생활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회사에 짓눌린 사람도 있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자기 문제로 버거운 사람들인데 거기에 미소까지 들어옵니다.
한 명 더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소의 삶을 무조건 자유롭고 낭만적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무책임합니다.
영화 역시 미소를 그렇게 쉽게 성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멋있지만 불편하고, 자유롭지만 남에게 기대며, 자기 삶에는 솔직하지만 그 솔직함의 비용 일부를 다른 사람이 내기도 합니다.
그게 미소라는 인물의 재미있는 점입니다.
완벽하게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움은 멀리 있을 때 쉽습니다
옛 친구들은 미소를 그리워합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밴드를 하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함께 놀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미소가 실제로 문 앞에 나타나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추억 속 미소와 집 안에 들어온 미소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취급됩니다.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집세가 안 들고, 밥도 안 먹고, 재워 줄 방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 하나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추억은 생활이 됩니다.
생활에는 비용이 듭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반가워하면서도 곤란해합니다.
잠깐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래는 어렵습니다.
아마 《소공녀》에서 가장 현실적인 감정이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옛사람을 그리워합니다.
특히 만나지 않을 때.
SNS에서 옛 친구 사진 하나 보고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쉽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오늘 밤 내 집에 와서 며칠만 지내도 되냐고 물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리움에는 책임이 없지만, 관계에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좋아하면서도 과거에 살았던 사람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일에는 망설입니다.
“여전하네.”
미소를 다시 만난 친구들이 느끼는 감정은 결국 이 한마디로 압축됩니다.
여전하네.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고, 사랑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 미소와 지금 미소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반대로 미소가 친구들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대단하다.
결혼을 했고, 집이 있고, 직장을 다니고, 가족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다들 그럭저럭 사회가 요구하는 모양을 갖췄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두 말이 칭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하다는 말은 “너답다”는 뜻 같았고, 대단하다는 말은 “잘 살았다”는 뜻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둘 다 일종의 항복 선언 같습니다.
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여전하네’라는 말밖에 할 수 없고, 견뎌낸 사람에게는 ‘대단하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미소는 여전하기 위해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여전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어느 쪽이 더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소에게는 집이 없고, 친구들에게는 예전의 자신이 없습니다.
미소의 방은 사라졌고, 친구들은 자기 안의 어떤 방을 닫아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보며 감탄합니다.
한쪽은 어떻게 아직도 그렇게 사느냐고.
다른 한쪽은 어떻게 여기까지 견뎠느냐고.
부러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비웃음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냥 서로가 치른 값을 알아보는 겁니다.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미소는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말합니다.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고.
멋있는 말입니다.
동시에 꽤 위험한 말입니다.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 여행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 말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미소는 정말 여행 중인 걸까.
아니면 돌아갈 곳이 사라진 상태를 여행이라고 부르는 걸까.
이 영화가 조금만 더 낭만적이었다면 분명 미소의 손을 들어줬을 겁니다.
“진짜 행복은 남들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다.”
대충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공녀》는 거기서 멈춥니다.
미소가 옳다고도 하지 않고, 친구들이 틀렸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아닙니다.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이런 문제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을 갖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삶이 비겁한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하는 삶이 무조건 멋진 것도 아닙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비용을 냅니다.
중요한 건 그 비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쪽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미소 쪽일까, 친구들 쪽일까.
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저는 친구들 쪽입니다.
대단한 쪽.
이 말을 써놓고 보니 이상합니다.
분명 좋은 말인데 전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대단하다.
얼마나 많은 걸 참고 살았으면 대단하다는 말을 듣게 됐을까.
얼마나 많이 포기했으면 그게 성취처럼 보이게 됐을까.
미소처럼 살 자신은 없습니다.
집 없이 위스키를 고를 자신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지키겠다고 모든 안전망을 놓아버릴 용기도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미소의 삶은 멋지지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금 제가 가진 것들이 전부 제 의지로 선택한 결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살면서 하나씩 타협했고, 하나씩 버렸고,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이겠죠.
그걸 우리는 보통 어른이 됐다고 표현합니다.
참 편리한 말입니다.
포기했다는 말보다 어른이 됐다고 하는 편이 훨씬 듣기 좋으니까요.
《소공녀》를 보고 나면 그래서 조금 불편해집니다.
미소가 부러워서가 아닙니다.
미소처럼 살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아주 오래전에 제가 버린 것들 가운데, 꼭 버리지 않아도 됐던 것이 하나쯤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면 결국 쌀이 문제였습니다.
자루에서 쌀이 새고 있었습니다.
미소는 몰랐습니다.
친구들도 어쩌면 몰랐을 겁니다.
누군가는 집이 새었고, 누군가는 꿈이 새었고, 누군가는 사람이 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소는 아직 자기 손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담배와 위스키와 사랑.
좋든 싫든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오래 남습니다.
미소가 여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친구들이 정말 대단해서도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면 괜히 내가 들고 있는 쌀자루를 한 번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중에 말고 지금.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