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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10년 걸린 귀향보다 어려운 용아맥 예매

원전까지 읽고 기다렸는데 — 매진, 암표, 그리고 스크린쿼터

2026년 9월 8일운영자 개인 의견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제법 성실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읽었습니다. 번역본이기는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혹시 제가 놓친 게 있을까 싶어 유튜브에 올라온 여섯 시간짜리 정리 영상도 챙겨 봤습니다. 2배속이었으니 실질적으로는 세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안 본 건 아니니까요. 트로이 전쟁 전후의 이야기도 다시 훑었고,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어디서 어떻게 얽히는지도 찾아봤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뷰와 배우들의 홍보 영상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극장에 가서 영화만 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너무 순진했다는 겁니다.

제가 준비해야 했던 건 『오디세이』의 줄거리나 그리스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CGV 예매 시스템과 인간의 집념, 그리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가능성에 대한 사전 학습이 먼저였어야 했습니다.

제가 노린 곳은 용산 아이파크몰 아이맥스, 흔히 말하는 용아맥입니다.

주말은 처음부터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욕심이 있어도 양심까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평일이면 괜찮겠지 싶었습니다. 평일 밤도 좋고, 막차가 끊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벽 한 시에 영화가 끝나서 택시를 타고 돌아오든, 다음 날 잠을 설쳐서 하루를 망치든 상관없었습니다.

영화 한 편 보겠다고 이 정도까지 양보했으니 저 스스로는 꽤 관대한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매창을 열기 전까지는요.

아침, 매진.

낮, 매진.

저녁, 매진.

밤, 매진.

날짜를 바꿔 봅니다. 매진.

다음 날도 눌러 봅니다. 매진.

그다음 날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기보다 조금 감탄했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보는구나. 역시 아이맥스의 세계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구나. 거의 문화적 열정에 대한 존경심까지 생길 뻔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주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저 사람들 중에 N차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순간부터 이건 기다리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 번 보고 빠지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아니라,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이 다시 줄 끝에 붙는 구조라면 저는 영원히 극장 밖에서 『오디세이』 원전만 복습하다 끝날 수도 있습니다.

숫자를 보면 더 실감이 납니다.

『오디세이』는 개봉 33일 만에 천만 관객을 넘겼고, 아이맥스 관람객만 11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기존 기록이었던 『아바타: 물의 길』의 92만 명을 넘어선 역대 최고 기록입니다.

천만을 넘었으니 이제 좀 한산해졌겠지 싶어 다시 예매창에 들어갔습니다.

확실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서너 자리 정도.

제가 생각했던 ‘한산함’과 영화관이 생각하는 ‘한산함’ 사이에는 꽤 넓은 철학적 간극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암표 이야기도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정가 1만 7천 원짜리 표가 4만 원, 5만 원에 거래되고, 좋은 자리에는 수십만 원을 부르는 경우까지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영화표 한 장에 30만 원.

그 돈이면 차라리 그리스행 항공권 특가부터 검색해 보고 싶어집니다. 물론 실제로 30만 원에 그리스에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숫자의 단위부터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궁금해졌습니다.

대체 저 사람들은 표를 몇 장이나 들고 있는 걸까요.

인기 있는 것에는 늘 이상한 방식으로 돈이 달라붙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좋아함에 가격표를 붙입니다. 저는 집에서 『오디세이』를 읽으며 오디세우스가 귀향까지 겪은 온갖 고난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같은 시간에 매크로를 돌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둘 다 부지런하기는 합니다.

성실함의 방향이 완전히 다를 뿐입니다.

조금 위안이 되는 사실이라면 이 현상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라는 정도입니다. 뉴욕에서는 35달러짜리 아이맥스 티켓이 1,000달러가 넘는 가격에 재판매되고, 여러 장을 묶어 수천 달러를 부르는 사례까지 나왔습니다.

자본주의의 악착같음에는 역시 국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암표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시간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스크린쿼터입니다.

한국의 영화관은 일정 기간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해야 합니다. 1년 365일을 기준으로 하면 최소 73일입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특별히 이상할 건 없습니다. 한국 영화를 보호하겠다는 제도의 취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계산이 극장 전체가 아니라 상영관 하나하나에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용산 아이맥스도 예외가 아닙니다.

8월 보도 기준으로 용아맥이 그해 채운 한국 영화 상영일은 35일. 앞으로 38일을 더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있던 일은 단순한 취소표 기다리기가 아니었습니다.

예매에 성공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시에, 『오디세이』가 용아맥에서 내려가는 날짜와 경주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종류의 레이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더 답답한 건 『오디세이』가 어디서 보든 별 차이 없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70mm 아이맥스 필름을 그대로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은 전 세계에서도 극히 제한적입니다. 해당 상영관은 41곳가량이고,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 영국에 몰려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사실상 없습니다.

한국에서 그나마 원래 화면비에 가장 가까운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용산 아이맥스입니다. 디지털 상영이기는 하지만 1.43:1 화면비를 구현할 수 있는 국내의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단순히 “다른 극장에서 보면 되지”라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대체 가능한 상영관이 10개, 20개 있는 영화라면 저도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특정 포맷으로 촬영된 영화를 그 의도에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전국에 사실상 하나뿐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 하나뿐인 스크린도 제도 안에서는 다른 일반 상영관과 똑같은 ‘한 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크린쿼터가 조금 낡아 보입니다.

물론 한국 영화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특별관에서까지 한국 영화가 완전히 밀려나는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제도가 보호하려는 대상과 관객이 실제로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 사이에 간격이 너무 벌어지면, 한 번쯤 계산법 자체를 다시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모든 스크린이 비슷했던 시절의 ‘한 관’과, 전국에서 그 포맷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관’을 정말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지금도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산정 방식을 극장 전체 단위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특별관에서 한국 영화가 밀려날 수 있다는 반론이 따라옵니다. 그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볼 기회 자체를 줄이는 방식으로 어떤 산업을 보호한다면, 그 보호는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제도를 위한 관객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저는 아직 『오디세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용아맥 예매창을 가끔 열어 봅니다. 취소표가 뜨면 반사적으로 눌러 보지만, 인간의 손가락으로는 따라가기 어려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매번 확인하고 돌아옵니다.

설마 내년 1월, 스크린쿼터가 새로 계산되기 시작할 때 재개봉한 뒤에야 보게 되는 건 아니겠죠.

뭐, 괜찮습니다.

원전은 이미 읽었습니다.

오디세우스도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신의 분노를 사고, 괴물을 만나고, 바다를 떠돌고, 부하들을 잃으면서도 결국 집에는 돌아갔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가 용산 아이맥스 한 번 들어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양반은 10년 뒤에라도 도착했습니다.

저는 아직 예매창입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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