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쥐,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살기 시작했을 때
가짜는 진짜를 대체할 수 없더군요 — 그런데 저는 그쪽이 딱해 보였습니다
『들쥐』 1화를 보다가 한 번 껐습니다.
주인공이 왜 저러는지는 알겠는데, 아는 것과 견딜 수 있는 건 별개의 문제더군요. 사람이 답답할 수는 있습니다. 찌질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걸 너무 성실하게 보여 주면 보는 사람도 같이 지칩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답답함에 인내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껐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켰습니다.
설경구 때문입니다.
이 배우에게는 조금 억울한 힘이 있습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계속 보게 만듭니다. 어디선가 이미 본 표정이고, 들어 본 말투 같고,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예전 작품의 인물들이 슬쩍 겹쳐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갑니다.
익숙함이 단점이 되지 않는 배우.
오히려 그 익숙함을 자기 브랜드처럼 써 버리는 배우.
결국 저는 2화를 틀었고, 그렇게 10화까지 갔습니다.
다 보고 나서 제일 오래 남은 건 반전도 아니고 누가 진짜인가 하는 수수께끼도 아니었습니다.
가짜가 조금 불쌍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랬습니다.
이 이야기의 뿌리가 된 설화는 꽤 잔인합니다. 사람이 아무렇게나 버린 손톱이나 발톱을 쥐가 먹고 그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진짜 대신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다음입니다.
누가 진짜인지 가려 달라고 관가까지 찾아가는데, 오히려 진짜가 가짜 취급을 받고 쫓겨납니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에서는 더 지독합니다. 집을 떠났던 진짜보다 그 자리를 차지한 가짜가 공부도 잘하고 효도도 잘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묘해집니다.
피와 기억과 출생으로 따지면 진짜는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더 완벽하게 해내는 쪽은 가짜입니다.
그럼 진짜란 뭘까요.
본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걸까요.
아니면 ‘본인답게 잘 사는 것’까지 해야 진짜가 되는 걸까요.
얼마 전에 읽은 성해나의 소설 「혼모노」가 같은 자리를 건드립니다.
30년 굿을 해 온 박수무당이 있습니다. 옆집에 젊은 무당이 들어오고, 평생 모시던 신이 그쪽으로 건너가 버립니다.
진짜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흉내 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굿은 계속해야 합니다. 손님이 오니까요. 신은 없어도 몸은 30년 치 순서를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
젊은 무당이 문수를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마지막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이번에는 문수가 젊은 무당에게 합니다.
같은 말이 그대로 돌아옵니다.
설화에서 도령을 쫓아낸 쥐가 나중에 고양이 앞에서 들었을 말이 이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진짜도 가짜도 한 번씩은 듣는 말입니다.
『들쥐』가 던지는 질문도 결국 그 주변을 맴돕니다.
처음에는 저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얘기인가.’
이런 이야기는 이제 꽤 익숙하니까요. 복제 인간이 나오든, 도플갱어가 나오든, 기억을 이식하든, 누군가 내 자리를 차지하든 결국 마지막에는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철학적으로 보이기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써서 이제는 조금 닳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들쥐』를 끝까지 보고 나니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진짜가 무엇인지보다 가짜가 왜 그토록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지가 더 궁금했습니다.
가짜는 결국 진짜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을 겁니다.
가짜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더 성실할 수도 있고, 더 친절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보다 가족에게 잘하고, 진짜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심지어 진짜보다 그 사람답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가짜 자신이 자신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남들은 속일 수 있어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게 꽤 끔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 누군가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
그 사람이 하던 행동을 따라 하고, 그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고, 그 사람의 기억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혹시라도 들킬까 봐 계속 자기 행동을 검열하는 삶.
처음에는 욕망으로 시작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노동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오래 계속되면 아마 불행하다는 감각마저 흐려질 겁니다.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에 익숙해지니까요.
가난에도 익숙해지고, 외로움에도 익숙해지고, 싫어하는 일을 매일 하는 데도 익숙해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가짜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남의 인생을 훔쳐 살고 있다는 죄책감보다, 이제 와서 자기 자리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공포가 더 커지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쪽이 조금 딱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남의 자리를 빼앗았으면 대가는 치러야죠.
다만 악인의 사정이 이해되는 것과 악행을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들쥐』가 재미있는 지점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SNS가 떠올랐습니다.
요즘 우리는 남이 흘리고 간 손톱을 주워 먹지는 않습니다.
대신 사진을 봅니다.
여행지에서 가장 잘 나온 한 장.
연인이 가장 다정했던 순간.
근사한 식사.
새 차.
새 집.
새로운 직장.
승진.
성공.
몸매.
자식.
남들이 자기 인생에서 정성스럽게 잘라 내어 올린 조각들을 매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조각을 그 사람의 인생 전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는 내 삶의 편집되지 않은 원본을 보고 있는데, 상대방의 삶은 잘 편집된 예고편만 봅니다.
비교에서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다 슬쩍 따라 합니다.
비슷한 곳에 가고, 비슷한 사진을 찍고, 비슷한 물건을 사고, 비슷한 표정을 짓습니다.
처음에는 참고였고 취향이었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한다고 알려 준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들쥐가 먹는 건 손톱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손가락으로 계속 화면을 올리면서요.
옛날 설화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오면 문제가 해결됐다고 합니다.
참 간편한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고양이가 한 마리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크린 타임을 세 시간 넘기면 휴대폰을 물어뜯어 버리는 정도의 사나운 놈으로요.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조금 미묘합니다.
류준열의 1인 2역이 이야기의 핵심이지만, 연기 자체가 이 드라마를 반드시 봐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두 인물을 구분해 보여 주는 기능은 충분히 수행하지만, 1인 2역이라는 말에서 기대하게 되는 압도적인 쾌감까지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끝까지 데려간 쪽은 설경구였습니다.
새롭지는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공공의 적』도 떠오르고, 어떤 순간에는 『불한당』도 스칩니다. 이제는 설경구가 이런 얼굴을 보여 주면 ‘아, 이쪽 설경구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재미있습니다.
보통 익숙함은 배우에게 위험합니다.
자기복제가 되니까요.
그런데 좋은 배우는 자기복제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눈빛 하나, 말끝 하나, 상대를 쳐다보는 시간 하나로 결국 다시 그 장면을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특별히 새롭지는 않았는데 좋았습니다.
참 불공평한 평가입니다.
류준열에게는 특별하지 않다고 해 놓고, 설경구에게는 특별하지 않은데도 좋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관객의 감상이 원래 공정한 인사평가일 필요는 없잖아요.
결국 제게 『들쥐』는 강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까지는 아닙니다.
초반에는 답답하고, 중간중간 이야기가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얼굴을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겠습니다’라는 기색이 조금만 덜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주말에 한 번 시작해서 끝까지 보기에는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다 보고 나면 이야깃거리가 생깁니다.
진짜란 무엇인가.
가짜는 왜 진짜가 되고 싶은가.
남을 흉내 내는 순간 나는 가짜가 되는가.
SNS 속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 자신인가.
이런 이야기를 조금 심각한 얼굴로 꺼내고 싶다면 제법 쓸 만한 작품입니다.
저처럼요.
가만 생각해 보면 저 역시 드라마를 보고, 옛 설화를 찾아보고, 거기서 이것저것 주워 와 제 생각인 양 한 편의 글을 만들고 있습니다.
남이 흘리고 간 이야기를 주워 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저도 들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까요.
뭐,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고양이가 안 왔으니까요.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