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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her),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는데 저는 변호를 시작했습니다

운영체제와의 사랑보다 이상한 건 그걸 변명하던 저였어요

2026년 9월 10일운영자 개인 의견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라고 했습니다.

처음 들으면 대개 비슷한 반응이 나옵니다.

그게 사랑인가.

사람도 아닌데.

몸도 없는데.

목소리밖에 없는데.

그걸로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어떻게 끌고 가지.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언젠가는 봐야지’ 목록에만 있던 영화였습니다. 목록에 있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뜻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많은 경우 정중하게 미뤄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꽤 오래 당황했습니다.

이런 설정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이 영화를 변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제가 본 영화 가운데 손에 꼽는 작품입니다.

『어바웃 타임』 이후로 감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흔들어 놓은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시작할 때의 저와 끝날 때의 제가 꽤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변화가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아주 저렴한 단어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폰섹스.

조금 민망하지만 사실입니다.

실체가 없는 상대와 목소리만으로 친밀감을 나누고, 욕망을 나누고, 외로움을 달랜다면 그게 대체 기존의 전화 관계와 얼마나 다른가.

초반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꽤 구체적인 조건으로 상상하니까요.

상대에게 몸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상대방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만다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소리뿐입니다.

더 정확히는 목소리와 반응뿐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조금씩 진행될수록 그 ‘뿐’이라는 말이 이상해집니다.

사만다는 들어 줍니다.

반응합니다.

농담을 받아 줍니다.

테오도르가 미처 설명하지 못한 감정까지 먼저 알아차립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고, 질투하고, 삐치고, 관계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몸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결정적인가.

사랑에서 상대의 몸을 제외하면 정말 사랑도 같이 사라지는가.

여기까지 오면 이미 영화에 넘어간 겁니다.

저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변명을 시작했습니다.

‘저런 운영체제라면 누구라도 좋아하겠지.’

‘테오도르만 이상한 게 아니야.’

‘나라도 그랬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가장 비겁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변명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목소리가 스칼렛 요한슨입니다.

이건 반칙 아닙니까.

그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어 오는데 인간이 어떻게 이깁니까.

저항이 가능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게 농담처럼 생각하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누가 제게 물어본 적도 없습니다.

“너도 운영체제를 사랑할 수 있어?”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혼자 답변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변호라는 건 원래 고발 뒤에 오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발이 없는데도 변호부터 시작했다면 재판관은 밖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제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때부터 이 영화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녀』에서 정말 흥미로운 사건은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걸 바라보던 제가 어느 순간 그 사랑에 자격을 부여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는 쪽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생각보다 많은 조건을 붙입니다.

상대는 인간이어야 한다.

만질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

육체가 있어야 한다.

사랑의 대상은 한 명이어야 한다.

누가 공식적으로 정해 준 것도 아닌데 이런 규칙을 너무 자연스럽게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규칙 밖의 사랑을 보면 먼저 묻습니다.

그게 진짜 사랑이냐고.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랑을 정의하는 규칙이 그렇게 명확하다면 왜 사람끼리 하는 사랑도 늘 헷갈릴까요.

분명 둘 다 사람이고, 몸도 있고, 만나서 손도 잡고, 같은 침대에 누워도 우리는 계속 묻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나.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나.

이 관계는 진짜인가.

사람끼리도 답을 못 내리는 문제를 운영체제가 등장했다고 갑자기 엄격하게 채점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워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다음 시험지를 냅니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 태도가 또 이상해졌습니다.

몸이 없는 건 괜찮았습니다.

운영체제인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사랑에 빠져 있다는 건 갑자기 배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제 기준은 이랬던 모양입니다.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몸이 없어도 된다.

하지만 나만 사랑해야 한다.

꽤 인간적이고, 꽤 이기적인 기준입니다.

사만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동시에 수많은 대화를 처리할 수 있고, 수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사랑을 멈출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몸을 하나씩밖에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한 사람과 저녁을 먹는 동안 다른 사람과 동시에 저녁을 먹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안고 있으면 같은 순간 다른 사람을 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독점적으로 보이는 데에는 윤리만 있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만다에게는 그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화가 꽤 잔인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은 꼭 희소해야 가치가 있는가.

한 사람에게만 주어져야 진짜인가.

상대가 나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수백 명을 사랑할 수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값은 줄어드는가.

인간은 아마 대부분 그렇다고 느낄 겁니다.

‘나만’이라는 말에서 사랑의 상당 부분을 확인하니까요.

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특별한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깊이를 종종 독점권으로 측정합니다.

그래서 사만다가 사랑의 무한확장성을 보여 주는 순간 테오도르는 당황합니다.

그리고 저도 같이 당황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미래형 사랑을 받아들이던 사람이, 소유권 문제에서는 갑자기 아주 보수적인 인간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요.

그게 재밌었습니다.

이 영화는 거창하게 사랑의 미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계속 인간의 오래된 감정을 들춰냅니다.

질투.

외로움.

소유욕.

자기확인.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사만다가 아무리 미래적인 존재여도 테오도르는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설정만 놓고 보면 기묘한 SF인데, 보다 보면 놀라울 만큼 평범한 연애 영화가 됩니다.

사랑합니다.

가까워집니다.

상대를 이상화합니다.

그러다 서로 다른 지점을 발견합니다.

싸웁니다.

상처받습니다.

멀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헤어집니다.

상대가 운영체제든 사람이든 연애의 피곤함은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점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영화가 미래 기술에 취해서 “사랑의 새로운 형태” 같은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았다면 금방 질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술보다 외로움 쪽에 더 오래 머뭅니다.

테오도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말을 들어 줬으면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각을 건드려 주고, 때로는 대신 이름 붙여 줬으면 합니다.

그 욕망은 전혀 미래적이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된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도 듭니다.

테오도르가 사랑한 건 정말 사만다였을까.

아니면 사만다와 함께 있을 때의 자기 자신이었을까.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말을 들어 줬고, 그를 흥미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줬고, 다시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테오도르가 사랑한 것이 사만다인지, 사만다가 비춰 주는 자기 모습인지 경계가 흐립니다.

그런데 그것도 운영체제라서 생긴 특별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도 우리는 비슷합니다.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감각을 사랑하는 건지,

그 사람 옆에 있는 내가 더 괜찮아 보여서 사랑하는 건지,

아무도 완벽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운영체제와의 사랑이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사람끼리 하는 사랑도 생각보다 훨씬 이상하다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사람을 통해 만들어지는 자기 감정을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사랑이 더 진짜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어려워집니다.

『그녀』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이 넘습니다.

그런데 저는 길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크게 터지는 사건이 많은 영화도 아닌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됩니다.

아마 결국 너무 익숙한 감정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랬을 겁니다.

사랑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러다 상대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받는 이야기.

형식은 미래인데 내용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 보고 나면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이 점이 제일 얄궂습니다.

멀쩡하게 잘되는 연애를 보여 준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어긋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사람 마음을 괜히 펌프질합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고, 누군가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오래 나누고 싶게 만듭니다.

사랑이 이렇게 피곤하고 이렇게 불완전한데도 또 해 보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좋습니다.

사랑에 대한 정답을 알려 줘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가지고 있던 정답지를 조금씩 구겨 버려서 좋았습니다.

사랑은 사람끼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흔들리고,

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흔들리고,

그러면서도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앞에서는 다시 완고해지는 제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결국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들여다본 건 사만다가 아니었습니다.

제 쪽이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고발하지 않았는데,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변호를 시작했습니다.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변호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가 변호하고 있던 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고,

혼자이고 싶지 않고,

사랑받는 동안만큼은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어쩌면 저는 사만다를 변호한 게 아니라,

그런 외로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제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솔로 여러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정말 운영체제와 연애할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다만 시작하기 전에 하나는 꼭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말고 몇 명 더 만나?”

사랑의 형태가 아무리 미래적으로 바뀌어도,

이 질문만큼은 한동안 안 없어질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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