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 종교 없는 사람을 두 시간 앉혀 둔 방법
변호하지 않는 대화는 믿을 만하더군요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종교, 특히 제도화된 종교를 보는 시선도 그리 따뜻한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두 교황》을 보기 전에 기대했던 건 신앙에 대한 감동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교황이라는 인물 자체에도 큰 관심이 없었고요.
제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
배우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 안소니 홉킨스는 아직도 어딘가에 한니발 렉터의 얼굴이 남아 있는 배우인데, 그런 사람이 교황을 연기한다니 좀 궁금했습니다.
렉터 박사가 교황이라니.
고해성사 받으러 들어가는 순간부터 괜히 긴장될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정도의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오래 저를 붙잡았습니다.
종교를 믿게 만들어서도 아니고, 교황이라는 자리를 위대하게 포장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이 영화는 자기 편을 거의 변호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작부터 화장실에서 《댄싱 퀸》을 붑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치는 장면부터 조금 이상합니다.
웅장한 성당도 아니고, 무거운 회의실도 아닙니다.
화장실입니다.
그리고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아바의 《Dancing Queen》을 휘파람으로 붑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웃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경계가 조금 풀렸습니다.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제가 막연하게 갖고 있던 불편함 중 하나는 이런 겁니다.
나를 앉혀놓고 뭔가를 가르치려 들 것 같은 느낌.
신앙이 없는 사람을 앞에 놓고 “당신은 아직 모른다”는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그런데 《두 교황》은 시작부터 그 자세를 살짝 비껴갑니다.
교황이라는 사람을 먼저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교황 옷을 입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게 별것 아닌 차이 같지만 저한테는 꽤 컸습니다.
초반의 설전은 두 번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본 건 두 사람의 대화였습니다.
특히 초반부의 설전은 한 번 보고 다시 돌려봤습니다.
변화를 두고 두 사람이 부딪힙니다.
한쪽에서는 전통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세상은 계속 움직이는데 교회만 멈춰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변화가 타협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타협이 아니라 자신이 달라진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걸 진보와 보수의 대화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혹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장면이라고 해도 되고요.
저는 그걸 보면서 조금 부러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가 저렇게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영화 속 두 사람도 처음부터 사이좋게 의견을 주고받지는 않습니다.
서로 꽤 날카롭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찌르고, 비꼬고, 불편한 이야기를 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화는 계속됩니다.
왜 저 대화는 가능한데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수많은 대화는 금세 싸움이 되는 걸까.
그 차이를 생각해 보니 결국 하나가 남았습니다.
저 두 사람은 자기가 틀렸을 가능성을 아예 닫아놓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은 강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도 있습니다.
그게 큽니다.
상대를 설득하려고만 하는 사람과,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대화 방식부터 달라집니다.
승부를 내러 나온 사람은 대화를 하기 어렵습니다.
이겨야 하니까요.
《두 교황》의 두 사람은 서로를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먼저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성립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과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둘을 흥미롭게 만드는 건 정치적 혹은 신학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둘 다 자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를 꽤 무겁게 들고 있습니다.
베르고글리오는 과거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 일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었던 이들 가운데 한 명은 훗날 그를 용서했지만, 다른 한 명은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대로 남깁니다.
저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서받은 사람 한 명을 보여주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인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인물을 무죄로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베네딕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털어놓는 어떤 고백은 아예 소리가 지워집니다.
관객에게 구체적인 말을 들려주는 대신 침묵을 남깁니다.
그 침묵 때문에 오히려 더 불편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불편함이 이 영화를 꽤 정직하게 만든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가장 걸렸던 건 고해성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마음에 걸리는 장면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고해하는 대목입니다.
저는 원래 고해성사라는 구조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고,
그 죄를 고백받는 사람이 있고,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죄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게 늘 걸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은 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상처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저에게는 그 질문이 남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죄를 듣고 사면하는 장면을 볼 때도 완전히 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부에서 서로 용서하고 끝내는 건가.’
그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교황》에서 제가 가장 놀란 건 바로 그다음이었습니다.
영화가 그 불편함을 모르는 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말합니다.
용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고해를 통해 죄지은 사람의 영혼이 가벼워질 수는 있어도, 그걸로 희생자의 상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죄악은 얼룩처럼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처럼 아물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 말을 영화 안에서 프란치스코가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이 잠시 뒤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저는 이 모순이 좋았습니다.
영화가 스스로 만든 인물을 완벽하게 정리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호하지 않는 영화는 의외로 믿을 만합니다
종교를 다루는 영화가 종교를 변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교황을 다루는 영화가 교황에게 호의적인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까지 덮어주느냐입니다.
《두 교황》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계속 좋은 말만 해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의 잘못은 잘못으로 남고,
용서받지 못한 관계는 용서받지 못한 채 남습니다.
고해를 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토의 고백에서도 영화는 아예 말을 끊어버립니다.
관객에게 친절한 설명을 주는 대신 불편함을 남기는 쪽을 택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영화를 믿게 됐습니다.
자기 인물을 사랑하지만 변호사 노릇까지는 하지 않는 영화.
저 같은 관객에게는 그런 태도가 꽤 중요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이들도 결국 선한 사람들이니 이해해 달라”는 식으로 접근했다면 아마 훨씬 일찍 마음을 닫았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두 사람을 꽤 가까이 보여줍니다.
그다음 판단은 관객에게 남깁니다.
저는 그 정도 거리가 좋았습니다.
결국 그들도 사람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남은 건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그들도 사람이구나.
조금 뻔한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두 교황》에서 이 말은 교황을 친근하게 포장하기 위한 문구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실수하고,
후회하고,
자기 판단을 의심하고,
상대에게 질투하고,
고집을 부리고,
농담을 하고,
때로는 자기 잘못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리가 교황일 뿐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닙니다.
영화 속에 이런 농담이 나옵니다.
기도하는 동안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으면 허락받기 어렵지만,
담배를 피우는 동안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으면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같은 행동인데 어디에서 문장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저는 이 농담이 《두 교황》이라는 영화 자체와 꽤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시작하면 저 같은 관객은 바로 경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반대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고집스럽고,
후회가 있고,
실수도 있고,
춤추는 음악도 좋아하고,
피자도 먹고,
축구도 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교황입니다.
순서를 바꾸니 이상하게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종교 영화라기보다 대화에 관한 영화
그래서 저는 《두 교황》을 보고 나서 이걸 종교 영화라고만 부르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분명히 있지만 제가 더 많이 본 건 대화였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두 사람이 어떻게 상대의 말을 듣게 되는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은 방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는가.
상대를 바꾸지 못해도 어떻게 대화를 끝내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게 더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이 한쪽의 승리처럼 그려지지 않는다는 게 좋았습니다.
진보적인 사람이 보수적인 사람을 계몽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전통적인 사람이 방황하던 사람을 올바른 길로 돌려놓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둘 다 조금씩 움직입니다.
누구는 더 크게 움직이고 누구는 덜 움직이지만, 적어도 처음 서 있던 자리 그대로 끝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부터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런 변화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배우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무리 논지를 붙여도 결국 이 영화의 가장 큰 힘 중 하나는 배우입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가 마주 앉아 말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생깁니다.
큰 사건이 없어도 됩니다.
말하다가 멈추고,
상대 표정을 보고,
웃었다가 다시 굳어지는 그 작은 변화들이 장면을 끌고 갑니다.
저는 처음에 정말 배우 때문에 영화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다 보고 나서도 그 선택은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종교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교황 두 명이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는 영화는 꽤 위험한 상품입니다.
한 줄 소개만 보면 잠이 올 가능성부터 떠오릅니다.
그런데 저는 초반 설전을 다시 봤습니다.
이 정도면 배우와 대사가 할 일은 다 한 셈입니다.
아니, ‘두 시간을 버텼다’고 쓰려고 했는데 그 표현도 맞지 않겠습니다.
버틴 게 아닙니다.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배우와 이야기가 멱살을 잡고 데리고 간 쪽에 가깝습니다.
종교가 없어도 괜찮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종교에 대한 제 생각이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한 불편함도 그대로입니다.
제도화된 종교를 향한 의심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화 한 편 보고 그렇게 쉽게 바뀔 문제도 아니고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두 교황》은 제가 가진 거부감을 없애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편함을 그대로 가지고 앉아 있어도 됐습니다.
심지어 제가 걸렸던 지점을 영화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서둘러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을 믿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의심해도 되는 자리를 남겨줘서요.
저 같은 사람에게 종교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아마 이런 방식이어야 할 겁니다.
설득하기 전에 말하고,
변호하기 전에 인정하고,
답을 주기 전에 자기 모순부터 보여주는 것.
그렇게 하니까 들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두 교황》은 제게 종교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대화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에 관한 영화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꽤 좋은 영화였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도,
없는 사람에게도 추천합니다.
다만 《두 교황》을 보고 나서 비슷한 결의 영화를 하나 더 찾는다면 저는 《다우트》를 먼저 권하겠습니다.
그 영화는 끝까지 관객 대신 결론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두 교황》을 보고 나니 왜 그런 태도가 정직하게 느껴지는지도 조금 더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믿을 만한 이야기는 늘 정답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까지 숨기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교황》은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