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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암은 너무 친절해서 무섭지 않았습니다

공포는 화면이 채우는 게 아니라 비워 두는 것이더군요

2026년 9월 10일운영자 개인 의견

저는 공포영화를 잘 안 봅니다.

겁이 많아서라기보다, 굳이 돈과 시간을 써서 무서워져야 하나 싶은 쪽에 가깝습니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 충분히 많은데, 영화관까지 찾아가 추가 요금을 낼 필요가 있나 싶달까요.

그러면서도 가끔 봅니다.

누가 옆에서 “이건 달라”라고 하면 또 넘어갑니다.

『컨저링』도 그렇게 봤고, 『곤지암』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공포영화를 잘 안 본다고 말하면서 추천 한마디에 계속 보는 걸 보면, 제가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건지 학습을 못 하는 건지는 조금 애매합니다.

아무튼 『곤지암』을 봤습니다.

그리고 별로 안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이미 숫자와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곤지암』은 손익분기점이 약 70만 명이었는데 최종 관객은 267만 명을 넘겼습니다. 저예산 공포영화로서는 대단한 성공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무서웠다는 뜻일 겁니다.

아니, 꽤 많은 사람에게 그랬겠죠.

그런데 저는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이상한 건, 저는 『곤지암』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이건 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한쪽은 극장용 공포영화고, 다른 한쪽은 낮 시간대 TV에서 재연 배우들이 심각한 얼굴로 귀신을 만나는 프로그램이니까요.

제작비부터 화면의 질감까지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재연 연기는 가끔 귀신보다 인간 쪽이 더 놀랍고요.

그런데도 저는 그게 무섭습니다.

오랫동안 그냥 제 취향이 이상한 줄 알았습니다.

『곤지암』을 보고 나니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공포는 보여 주는 만큼 커지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곤지암』은 너무 많이 보여 줍니다.

영화는 유튜브 생방송을 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폐병원에 들어가고, 몸과 머리에 카메라를 달고, 곳곳에 장비를 설치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꽤 많은 것을 봅니다.

누가 어디 있는지 보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 누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확인합니다.

카메라가 참 부지런합니다.

한쪽을 놓칠 것 같으면 다른 카메라가 받아 줍니다.

현장 중계로서는 훌륭합니다.

공포영화로서는 조금 문제가 생깁니다.

안 보이는 데가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 방식이 신선합니다.

일반적인 영화처럼 카메라가 얌전히 인물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실제 인터넷 방송을 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형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잡아먹습니다.

사건이 일어납니다.

카메라가 보여 줍니다.

배우가 놀랍니다.

다른 카메라가 그 배우의 얼굴을 보여 줍니다.

숨이 가빠집니다.

비명을 지릅니다.

달립니다.

또 다른 일이 생깁니다.

다시 숨이 가빠집니다.

다시 비명을 지릅니다.

중반을 넘어가면서 저는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무서운 일이 계속 벌어져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무서워해서였습니다.

물론 배우가 공포에 질린 연기를 못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몇몇 순간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특히 박지현 배우의 공포에 질린 표정은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비명이 계속되면 비명도 평범해집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지?” 하고 긴장합니다.

두 번째도 긴장합니다.

몇 번 더 반복되면 이제 패턴을 압니다.

또 놀라겠구나.

또 비명을 지르겠구나.

또 뛰겠구나.

공포에도 인플레이션이 있습니다.

돈을 너무 많이 풀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듯, 비명을 너무 많이 풀면 비명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한 번의 비명이 100만 원짜리였는데,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동전처럼 굴러다니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배우의 공포이지 제 공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차이가 중요했습니다.

누군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본다고 해서 제가 자동으로 슬퍼지는 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왜 슬픈지 알고, 제가 그 상황 안으로 들어가야 그 감정이 제 것이 됩니다.

공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화면 속에서 아무리 벌벌 떨어도 제가 무서워할 이유가 생기지 않으면 결국 남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곤지암』은 종종 제가 무서워질 시간을 주기보다 배우가 먼저 무서워해 버립니다.

“여기 무서운 장면입니다.”

“지금 놀라셔야 합니다.”

“보세요. 이 사람도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잖아요.”

친절합니다.

너무 친절합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방관자가 됩니다.

배우들이 제 몫까지 열심히 공포를 느껴 주니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감정을 외주 맡긴 상태입니다.

문제는 공포라는 감정이 외주가 잘 안 된다는 겁니다.

남이 대신 무서워해 준다고 제가 편하게 받아먹을 수 있는 장르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관객에게 일을 시켜야 합니다.

뭔가 있다고 말해 놓고 안 보여 줘야 합니다.

저쪽 방에서 소리가 났는데 카메라는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복도 끝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초점을 맞춰 주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봤다고 말했는데 정말 본 건지는 확인시켜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빈칸을 남겨 놔야 관객이 스스로 채웁니다.

그리고 사람은 빈칸을 굉장히 악의적으로 채우는 존재입니다.

특히 무서워하고 있을 때는요.

제일 나쁜 걸 상상합니다.

실제로 뭘 보여 주면 그 순간부터 크기와 모양이 정해집니다.

‘아, 저거구나.’

그러면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안 보여 주면 제한이 없습니다.

뭐든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공포가 바로 그쪽에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아직 보이지 않은 것이 더 무섭습니다.

설명된 것보다 설명되지 않은 것이 더 오래 남고요.

그래서 참 이상하게도 「서프라이즈」가 저에게는 먹힙니다.

화면만 놓고 보면 『곤지암』과 비교하기 민망합니다.

재연은 투박하고, 화면은 단순하고, 특수효과는 가끔 특수효과라는 사실 자체가 너무 잘 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허술함 때문에 남는 자리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것보다 무서웠겠지.’

제가 알아서 고쳐서 상상합니다.

프로그램은 조금 보여 주고, 나머지는 제 머리가 제작합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는 투로 밀어붙입니다.

그 말을 믿든 안 믿든 순간적으로 현실과 연결되는 틈이 생깁니다.

그 틈 하나가 꽤 큽니다.

화면 속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방문 밖이 갑자기 조금 신경 쓰입니다.

『곤지암』은 반대였습니다.

저에게 상상하라고 맡기지 않습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붙여서 열심히 설명합니다.

이쪽 상황도 보여 주고, 저쪽 상황도 보여 주고, 등장인물이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용자 경험이 아주 친절합니다.

문제는 공포영화의 사용자 경험이 친절해서 좋을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공포영화는 어느 정도 불친절해야 합니다.

관객을 혼자 내버려 둬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여 줄 테니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생각하세요.’

그 정도 무책임함이 필요합니다.

『곤지암』은 책임감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심했습니다.

화면에 계속 답이 나오니까요.

물론 형식적 성취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과 다중 카메라를 영화의 문법으로 가져온 방식은 당시 꽤 영리했고, 젊은 관객이 익숙한 화면을 공포의 장치로 사용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흥행 결과만 봐도 분명 그 방식은 많은 관객에게 통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안 무서웠다고 해서 이 영화가 실패한 공포영화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저에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제가 공포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해 온 것도 조금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공포가 싫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공포를 너무 열심히 설명하는 걸 싫어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무섭다고 소리치는 사람을 오래 보고 있는 것도 싫고요.

저한테 무서워하라고 재촉하는 순간 오히려 감정이 식습니다.

웃으라고 옆구리를 찌르면 웃음이 안 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 웃긴 장면이에요.”

라고 설명하는 코미디가 대개 안 웃긴 것처럼,

“여기 무서운 장면이에요.”

라고 계속 알려 주는 공포도 잘 안 무섭습니다.

결국 감정은 관객이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영화가 아무리 친절하게 배달해 줘도 마지막 한 칸은 제가 넘어가야 합니다.

『곤지암』은 그 마지막 한 칸까지 배우들이 대신 넘어가 버린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다 보고 난 뒤 무섭기보다는 조금 시끄러웠습니다.

무서운 게 너무 적어서가 아닙니다.

너무 많이 무서워해서요.

아이러니합니다.

공포영화가 관객을 무섭게 만들려고 그렇게 열심히 애썼는데, 바로 그 노력 때문에 저는 덜 무서웠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 또 공포영화를 추천한다면 이제는 질문을 조금 바꿔 볼 생각입니다.

“많이 무서워?”

이렇게 묻지 않고,

“많이 보여 줘?”

라고요.

많이 보여 준다고 하면 아마 안 볼 겁니다.

그럴 바에는 불을 끄고 「서프라이즈」나 보겠습니다.

적어도 거기는 제작비가 부족해서라도 좀 남겨 주니까요.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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