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묵시록 카이지, 무서운 건 저 인간들이 아니라 나였습니다
오늘의 내가 편하기 위해 내일의 나에게 빚을 넘깁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워낙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처음 봤을 때 저도 자연스럽게 이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빚에 몰린 사람들, 거액의 상금, 극한 상황에 내몰린 인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씩 벗겨지는 욕망.
처음에는 솔직히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거 카이지 생각나는데?’
물론 비슷한 소재를 사용했다고 해서 두 작품이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카이지』를 먼저 본 사람이라면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한 번쯤 이 작품을 떠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카이지』가 만들어 놓은 인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카이지』를 오래 기억하는 이유는 게임 때문이 아닙니다.
도박도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결국 인간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쉽게 속일 수 있는지를 너무 지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카이지가 한심했습니다
카이지를 보고 있으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왜 저 선택을 하지?
왜 또 믿지?
왜 그만두지 못하지?
겨우 살아남았으면 이제 정신 차리고 평범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보는 사람은 참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화면 밖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돈을 걸지 않았고, 목숨도 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이지와 그 주변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찰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거야.’
‘저런 데 왜 들어가?’
‘나라면 절대 저렇게 안 하지.’
그런데 『카이지』가 무서운 건 조금 지나면 그 말들이 점점 자신 없어지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정말 나는 안 그럴까?
정말 돈이 눈앞에 있어도 멈출 수 있을까?
지금 한 번만 더 하면 잃은 것을 전부 되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돌아설 수 있을까?
사람들은 도박에 빠진 사람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카이지』는 도박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이용할 뿐, 사실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조금만 더.
이번 한 번만.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부터는 달라질 거야.
이 말들.
너무 익숙합니다.
욕망은 항상 그럴듯한 얼굴로 찾아옵니다
저는 『카이지』가 인간의 탐욕을 굉장히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탐욕은 흔히 생각하는 탐욕과 조금 다릅니다.
대단한 부자가 되고 싶어서 남을 짓밟는 사람만 탐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잃은 것을 되찾고 싶은 마음.
조금만 편해지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앞서고 싶은 마음.
이번 한 번만 운이 따라줬으면 하는 마음.
『카이지』에서 사람을 파멸시키는 욕망은 대부분 처음부터 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작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처음부터 미친 선택이라면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 한 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음 선택에서는 앞선 선택 때문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다음에는 이미 돌아가기 아까워집니다.
그렇게 사람이 빠져듭니다.
도박의 무서움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겁니다.
욕망이 처음부터 악마의 얼굴을 하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굉장히 합리적인 표정을 하고 찾아옵니다.
‘여기까지 잃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찾을 수 있잖아.’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카이지』를 보면서 남을 욕하기 어려운 이유
이 작품을 보는 동안 제가 가장 불편했던 지점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을 평가합니다.
저 사람은 비겁하고.
저 사람은 멍청하고.
저 사람은 욕심이 너무 많고.
저 사람은 배신할 줄 알았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평가하기가 조금 어려워집니다.
저런 극한 상황에 내가 들어간다면 과연 얼마나 고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걸리고 돈이 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밀어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지금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자신 있게 ‘나는 다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저는 조금 더 무섭습니다.
『카이지』에 나오는 사람들도 아마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자신을 그렇게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상황이 사람을 바꾸기도 하지만, 어쩌면 상황은 원래 안에 있던 것을 꺼내놓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카이지』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계속 듭니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추한 선택을 보면서 마음 편하게 욕하기가 어렵습니다.
‘쯧쯧.’
하고 끝내고 싶은데 작품이 자꾸 뒤에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 같습니다.
‘너는?’
그 한마디 때문에 불편해집니다.
내일부터라는 말
그리고 제가 『카이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고 있는 대사가 있습니다.
‘내일부터 힘내자. 내일부터 절약하자.’
그런 생각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
내일부터 힘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힘내야 하고, 오늘부터 시작한 사람에게만 내일이 온다는 말.
저는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꽤 아팠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잔혹한 장면보다 어쩌면 이 말이 더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도박꾼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내일부터’라는 말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내일부터 운동해야지.
내일부터 술 줄여야지.
내일부터 공부해야지.
내일부터 돈 아껴야지.
내일부터 일찍 자야지.
내일부터 좀 제대로 살아야지.
저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내일’은 굉장히 성실합니다.
항상 다음 날 다시 나타납니다.
문제는 제가 그대로라는 겁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한 지하노역장의 행복
그래서 저는 그 대사가 나오는 에피소드가 『카이지』 전체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환경에 처한 사람이 아주 작은 사치를 누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행복합니다.
오늘 힘들었으니까.
오늘 정도는 괜찮으니까.
내일부터 아끼면 되니까.
이 논리는 정말 강합니다.
너무 강해서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써본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큰 실패는 언제나 거대한 결심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 하루 정도는’이라는 아주 작은 허락이 쌓여서 만들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카이지에게 지급되는 작은 즐거움은 그래서 단순한 유혹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현재의 쾌락과 미래의 자신을 거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오늘의 내가 편하기 위해 내일의 나에게 빚을 넘깁니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그다음 날의 나에게 넘깁니다.
생각해 보면 꽤 악질적인 다단계입니다.
피해자도 나고 가해자도 나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악당은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카이지』에는 분명 악인이 나옵니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자들이 있고, 타인의 고통을 오락처럼 바라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오래 보고 있으면 진짜 상대는 따로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의 마음입니다.
욕심.
공포.
희망.
자기합리화.
그리고 ‘이번만’이라는 생각.
재미있는 것은 희망조차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만 더 하면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
이번에는 될 것 같은 희망.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허사가 될 것 같은 마음.
보통 이야기에서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카이지』에서는 희망과 욕망의 경계가 무척 얇습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정신적으로 피곤합니다.
게임 하나 끝났다고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습니다.
카이지가 살아남았다고 안심했는데, 또다시 인간의 욕망이 고개를 듭니다.
‘이제 그만해.’
시청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이지는 다시 움직입니다.
그러다 문득 깨닫습니다.
저런 행동을 나는 정말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가.
도박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비슷한 선택을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생각이 들면 조금 무서워집니다.
결국 카이지를 보면서 제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저에게 단순한 도박 애니메이션이 아닙니다.
극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심리전도 재미있고, 누가 속이고 누가 살아남을지를 보는 긴장감도 엄청납니다.
하지만 그것만 있었다면 이렇게 오래 기억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자꾸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등장인물을 구경만 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카이지를 보고 웃습니다.
답답해합니다.
욕합니다.
그런데 점점 웃음이 줄어듭니다.
카이지가 특별히 한심한 인간이라서 저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운이 나빴다면.
조금 더 절박했다면.
조금 더 유혹이 강했다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카이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합니다.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
거창하게 인생을 바꾸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것.
오늘 한 번 참는 것.
오늘 한 번 시작하는 것.
말로 적으면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해서 카이지의 사람들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가끔은 저도 그렇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 대사를 아직도 가슴 한쪽에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이지』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누군가가 목숨을 거는 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순간.
‘오늘까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내일부터.’
그 말이 저는 아직도 무섭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