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기록, 청춘은 희미했고 박보검만 또렷했다
사건은 앞으로 뛰어가는데 감정은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드라마
「청춘기록」을 보기 시작한 이유를 굳이 작품성이나 소재에 대한 관심으로 포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박보검 때문이었습니다.
예고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인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를 켤 때마다 얼굴이 보였고, 마침 제가 좋아하는 배우였고, 그렇게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드라마를 시작하는 이유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문제는 16회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시작할 때의 이유가 거의 그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박보검 때문에 보기 시작했고, 결국 박보검을 보며 끝냈습니다.
그 사이에 「청춘기록」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작품 자체는 점점 흐릿해졌습니다.
꿈을 향해 달리는데 이상하게 숨이 차지 않는다
제목이 「청춘기록」입니다.
제목만 보면 꽤 많은 것이 떠오릅니다.
불안정한 미래, 부모와의 갈등, 친구와의 경쟁, 사랑과 현실 사이의 선택, 돈이 없어서 겪는 서러움, 재능만으로는 건너기 힘든 계급의 벽. 청춘이라는 시기는 원래 이야깃거리가 넘쳐납니다.
이 드라마에도 그런 재료는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사혜준은 성공하고 싶은 배우이고, 가진 것이 많은 친구 원해효와 같은 세계에서 경쟁합니다. 안정하는 자신의 힘으로 삶을 꾸려 가고 싶어 하고, 주변 어른들의 인생 역시 돈과 가족과 자존심 때문에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그러니 분명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긴장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질투하고, 사랑이 시작되고, 가족끼리 싸우고, 연예계의 냉혹함도 등장합니다. 사건만 적어 놓으면 제법 바쁜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시청자인 저는 별로 바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가 미치도록 궁금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선택 때문에 마음을 졸이지도 않았습니다.
사건은 앞으로 뛰어가는데 감정은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개가 느린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일이 꽤 빠르게 처리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했습니다.
보통 이야기가 빠르면 몰입도 같이 따라붙어야 하는데, 「청춘기록」은 속도는 있는데 밀도가 없습니다. 중요한 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인물이 그 사건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전에 다음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청춘을 기록한다면서 정작 기록해야 할 순간마다 페이지를 너무 빨리 넘겨 버린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꽤 괜찮은데, 이야기가 그들을 오래 살려 두지 않는다
초반에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든 것은 스토리보다 사람이었습니다.
박보검은 당연했습니다.
제가 애초에 그 배우를 보려고 시작했으니 공정한 평가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혜준이라는 인물이 가진 반듯함과 박보검이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꽤 잘 맞았습니다.
문제라면 너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잘생겼고, 예의 바르고, 자기 신념이 있고, 가족을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공한다고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지지도 않습니다.
보다 보면 흠을 찾아보고 싶어질 정도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물론 이런 청춘도 있겠죠.
다만 드라마 속 인물로서는 조금 심심합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반듯하면 현실에서는 칭찬을 받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때때로 균열이 필요합니다. 사혜준에게도 고난은 계속 찾아오는데 인물 자체가 크게 흔들리지 않으니 어느 순간부터 고난조차 그를 빛내기 위한 조명처럼 보였습니다.
“봐라, 이렇게 힘든데도 우리 혜준이는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다.”
드라마가 자꾸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박보검을 좋아하는데 굳이 작품까지 옆에서 영업을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초반에는 이민재와 한애숙에게 더 눈길이 갔습니다.
신동미와 하희라는 이야기에 생활감을 넣어 줍니다. 특히 성공을 꿈꾸는 청춘 옆에서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걱정하고, 대신 싸우고, 때로는 웃음을 만드는 인물들이 있어서 드라마가 그나마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신애라와 한진희 같은 익숙한 배우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청춘 드라마를 보면서 젊은 배우들보다 제가 오래전부터 봐 온 배우들이 등장할 때 더 반가워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쯤 되면 작품과 함께 제 나이도 확인하게 됩니다.
별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은 사실입니다만.
박소담은 끝까지 제게 조금 먼 배우
안정하는 이 드라마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자기 삶에 대한 태도도 분명하고, 독립적이며, 생각을 말로 표현할 줄 압니다. 대본만 놓고 보면 요즘 시대의 청춘을 상징하기에 꽤 적합한 캐릭터였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안정하에게 깊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박소담이 연기를 못한다고 단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배우의 출연작을 충분히 본 것도 아니고, 「청춘기록」 한 작품만으로 배우 전체를 평가하는 건 지나치니까요.
다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안정하라는 사람이 제게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좋은 말을 하고, 제법 멋진 생각도 하고, 사랑도 하고, 고민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이라기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창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는 박소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대본의 책임이 더 커 보입니다.
안정하뿐 아니라 원해효도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사혜준과 다른 환경에서 출발한 친구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같은 꿈을 꾸지만 가진 조건은 다르고, 우정 뒤에는 언제라도 경쟁심이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야기꾼 입장에서는 꽤 맛있는 재료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익히지 못했습니다.
갈등은 생기지만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고, 인물의 감정은 흔들리지만 제 마음까지 흔들지는 못합니다.
좋은 캐릭터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려 놓고 물을 조금씩만 주다가 드라마가 끝난 기분입니다.
좋은 말이 너무 많으면 좋은 대사가 사라진다
「청춘기록」에는 기억해 둘 만한 문장이 많았습니다.
돈, 인간관계, 사랑, 행복, 성공, 가족, 자존심에 관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그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드라마, 대사 괜찮네.’
그런데 몇 회가 지나면서 묘한 느낌이 생겼습니다.
대사가 인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사가 등장할 차례가 되어서 인물의 입을 빌리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드라마의 좋은 대사는 장면과 함께 기억됩니다.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울리고, 지나고 나서도 그 표정이나 장소와 함께 떠오릅니다.
그런데 「청춘기록」의 몇몇 문장은 따로 떼어 SNS에 올리면 훨씬 그럴듯할 것 같았습니다.
문장은 좋은데 장면은 흐릿합니다.
좋은 말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그으라고 친절하게 형광펜까지 건네주는 드라마 같기도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밑줄을 긋습니다.
계속 그러면 나중에는 형광펜 뚜껑을 닫게 됩니다.
저는 명대사가 많은 드라마보다, 평범한 한마디를 명대사로 만들어 버리는 드라마를 더 좋아합니다.
「청춘기록」은 그 반대편에 조금 더 가까웠습니다.
성공한 뒤부터 오히려 이야기가 작아졌다
사혜준의 성공은 드라마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당연히 그 이후가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명 배우가 성공하면 이전에는 없었던 문제가 생깁니다. 돈이 생기고, 사람이 붙고, 친구와 가족의 관계가 달라지고, 사랑 역시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기 어려워집니다.
성공은 목표의 도착점이라기보다 더 복잡한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춘기록」은 그 좋은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갈등은 있습니다.
스캔들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감정도 바뀌고, 사혜준과 안정하의 관계에도 현실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제가 기대했던 것만큼 치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면서 변하는 과정이나, 성공하지 못한 친구가 느끼는 열등감처럼 조금 불편한 감정을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자꾸 적당한 지점에서 멈춥니다.
누군가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싫고, 주인공에게 돌이키기 어려운 잘못을 시키기도 싫고,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기도 싫어하는 듯합니다.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이해 가능성을 남겨 줍니다.
착한 선택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는 조금 재미없습니다.
상처가 날까 봐 끝까지 칼집에서 칼을 꺼내지 않는 느낌입니다.
결국 후반부로 갈수록 제가 느낀 것은 아쉬움보다 무관심에 가까웠습니다.
초반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다면, 후반에는 “이제 어떻게 정리하려나” 정도였습니다.
기대의 방향부터 달라진 것입니다.
청춘을 보려고 했는데 박보검의 필모그래피 한 줄을 봤다
종영하고 나서 생각해 봤습니다.
「청춘기록」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았나.
미안하지만 청춘은 아니었습니다.
사혜준의 성공 과정이 아주 강하게 남지도 않았고, 안정하와의 사랑이 오래 먹먹하게 남지도 않았습니다. 친구들의 관계도, 가족들의 갈등도 생각보다 빨리 희미해졌습니다.
결국 박보검이 남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를 보려고 시작했으니 목적 달성이라고 하면 목적 달성입니다.
16시간 가까이 투자해서 좋아하는 배우를 실컷 봤으니 손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작품을 다 본 뒤에도 ‘박보검 좋더라’가 가장 먼저 나온다는 것은 드라마 입장에서는 썩 기분 좋은 칭찬이 아닐 겁니다.
배우를 빛나게 하는 작품은 좋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사라지고 배우만 남으면 조금 곤란합니다.
초반에는 캐릭터들이 제법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가 조금 약해도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계속 힘을 받지 못하니 결국 캐릭터들까지 하나씩 평평해졌습니다.
바람이 빠지는 데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야기가 힘을 잃었고, 그다음 관계가 힘을 잃었고, 마지막에는 제가 기대를 잃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났는데 크게 섭섭하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그것일 겁니다.
「청춘기록」이 아주 형편없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쁜 화면도 있고, 좋은 배우도 많고, 괜찮은 문장도 많습니다. 가족에 관한 몇몇 장면은 따뜻했고, 성공과 계급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장점을 하나의 이야기로 단단하게 묶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근사한 재료들이 한 상 가득 올라왔는데 이상하게 식사를 마친 뒤 무엇을 먹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배는 채웠는데 맛은 희미합니다.
청춘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면 너무 편리한 변명일 겁니다.
청춘은 흔들리고, 지루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맞습니다.
하지만 드라마까지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결국 제가 「청춘기록」에서 가장 또렷하게 기록해 둔 것은 청춘이 아니라 한 배우의 얼굴이었습니다.
박보검을 좋아한다면 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저처럼요.
그렇지 않다면 16부작을 견딜 다른 이유가 하나쯤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