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밤새 보게 한 것과 산으로 보낸 것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비밀의 수수께끼. 그게 용이었고, 그게 뱀 꼬리였습니다.
제 첫 미드는 《프리즌 브레이크》였고, 두 번째가 《로스트》였습니다.
한창 미드라는 걸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추천 목록에서 좀처럼 빠지지 않던 작품이었고, 그렇게 별생각 없이 시작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6시즌 121회를 단기간에 거의 밤을 새워 가며 봤습니다. 다음 회가 궁금했고, 그다음 회는 더 궁금했습니다. 한 편만 더 보자는 말이 가장 지켜지지 않는 드라마 중 하나였습니다.
《로스트》의 이야기를 아주 단순하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각자의 과거와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비행기 사고로 정체불명의 섬에 추락하고, 살아남기 위해 부딪히는 동안 섬이 감추고 있던 거대한 수수께끼와 마주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짧은 설명 안에 《로스트》의 장점과 단점이 전부 들어 있습니다.
거대한 비밀의 수수께끼.
이 드라마를 밤새 보게 만든 것도 그것이고, 결국 산으로 보내버린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질문을 만드는 데는 천재였고, 대답하는 데는 아니었습니다
섬은 대체 무엇인가.
그 숫자는 무엇인가.
검은 연기 같은 저것은 또 무엇인가.
이미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로스트》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방법을 너무 잘 압니다. 하나를 보여준 뒤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하나를 보여준 다음 두 개를 더 궁금하게 만듭니다. 겨우 한 가지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그 실마리 끝에 또 다른 문이 있고, 문을 열면 방이 아니라 복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보통 드라마를 두고 몰입도가 높다고 표현하지만, 전성기의 《로스트》에는 그 정도 표현이 조금 얌전하게 느껴집니다. 몰입하는 수준이 아니라 잠을 안 자게 만듭니다. 제작진이 다음 회 버튼 위에 사람 손을 묶어놓은 것처럼 계속 보게 됩니다.
문제는 이 방식이 영원히 통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저는 시즌 3 중반쯤부터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재미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건 아닙니다. 이미 여기까지 봤으니 궁금하기도 했고, 여전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보던 거니까 본다.
121회를 거의 쉬지 않고 본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니 어쩌면 행복에 겨운 투정입니다. 그래도 투정은 투정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단순했습니다.
비밀은 클수록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비밀은 클수록 수습하기 어렵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섬의 정체도, 등장인물의 운명도, 초자연적인 현상도 모두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질문이 주는 쾌감보다 답이 주는 쾌감은 대개 작습니다. 더구나 질문을 100개 던졌다면 100개를 모두 만족스럽게 회수해야 합니다. 하나를 설명하면 두 개가 시시해지고, 두 개를 설명하면 세 개가 모순됩니다.
그래서 《로스트》는 자꾸 답을 미루고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게 통하는 동안에는 밤을 새웁니다.
그게 안 통하기 시작하면,
보던 거니까 봅니다.
결국 저를 밤새게 한 것과 지치게 한 것이 똑같았습니다.
거대한 비밀.
작가 파업 때문에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2007~2008년 미국 작가조합 파업의 영향을 받아 시즌 4 제작 일정과 회차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보다 앞선 시즌 3 중반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감상만 놓고 보면 모든 걸 파업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비밀을 감당하기 버거워지고 있었고, 파업은 그 문제를 만든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구조를 한 번 더 세게 흔든 사건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정말 희대의 명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문제는 이야기가 작아서가 아니라 너무 컸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리대왕》을 떠올리게 했던 사람들
《로스트》를 보는 동안 저는 종종 《파리대왕》을 떠올렸습니다.
비행기 추락과 고립된 공간이라는 표면적인 공통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격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문명으로부터 떨어진 공간에서 충돌하고, 협력하고, 배신하고, 다시 손을 잡는 모습 때문입니다.
《로스트》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인간이 가진 속성을 하나씩 나눠 가진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성과 믿음, 희생과 이기심, 책임감과 욕망.
그래서 이 작품의 진짜 힘은 섬의 비밀보다 어쩌면 그 비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제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인물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비밀과의 관계가 명확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벤자민 라이너스입니다.
마이클 에머슨.
중반 이후 《로스트》를 이 배우가 끌고 갔다고 해도 저한테는 과장이 아닙니다.
벤은 비밀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궁지에 몰려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기묘한 표정과 말투를 보고 있으면 캐릭터가 대단한 건지 배우가 대단한 건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제가 나중에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기 시작한 것도 사실상 마이클 에머슨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강하게 남은 배우였습니다.
벤 이전에는 존 로크가 있었습니다.
로크는 비밀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섬을 단순한 사고 현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이유가 있고, 자신이 이곳에 온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답을 찾으려 할 때 로크는 오히려 답이 이미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로크는 배우의 매력보다는 캐릭터 자체가 오래 남은 경우였습니다. 극 전체에 이상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이어.
아마 주요 인물 중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밀이니 운명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에 가장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기적이고, 얄밉고, 계산적이고, 때로는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미워하기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캐릭터로도 배우로도 매력이 넘쳤습니다.
솔직히 남자 주인공보다 훨씬 기억에 남습니다.
케이트도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에는 외모가 특별히 제 취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드라마를 보다 보면 문득문득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왜 강한 여자는 그렇게 섹시해 보이는 건지.
김윤진 배우가 연기한 선도 빼놓기는 어렵습니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작품에서 마지막 시즌까지 살아남았고, 후반부까지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 배우가 그 정도 위치를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것 자체는 지금 다시 봐도 괜히 반갑고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배우였으니 더 눈길이 갔고 그래서 기억하는 것이지, 등장인물 자체가 특별히 매력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 이야기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정작 남자 주인공 잭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별로 기억이 안 납니다.
잭이 형편없는 캐릭터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형적인 주인공에게 필요한 요소는 거의 다 갖춘 사람입니다. 책임감도 있고, 판단력도 있고,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도 합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너무 강합니다.
벤이 나오고, 로크가 있고, 소이어가 있는데 잭은 그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평범해집니다.
주인공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결국 《로스트》라는 드라마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벤은 비밀을 쥐고 있습니다.
로크는 비밀을 믿습니다.
소이어는 비밀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잭은 비밀을 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로스트》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이 바로 비밀을 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드라마 자체가 좀처럼 답을 주지 않으니까요.
비밀을 쥔 사람은 신비롭게 보이고, 비밀을 믿는 사람은 광적으로 보이고, 비밀을 무시하는 사람은 쿨해 보입니다.
그런데 비밀을 풀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매번 또 다른 비밀을 만납니다.
그러니 기억 속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잭은 121회 동안 섬과 싸운 게 아니라 작가들과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싸움은 애초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로스트》는 추천합니다
그래서 제게 《로스트》는 명작이면서 동시에 용두사미입니다.
두 표현이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만큼 두 단어가 잘 어울리는 드라마도 드뭅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처음 품었던 기대만큼 모든 것이 정교하게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초반에 벌여놓은 판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마지막에는 무엇을 가져다 붙여도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추천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여전히 추천합니다.
강추입니다.
왜냐하면 용두사미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흔히 꼬리만 보기 때문입니다.
《로스트》는 분명 꼬리가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 붙어 있던 게 정말 거대한 용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수많은 시청자를 매주 수수께끼 앞으로 끌고 왔고, 몇 년 동안 섬 하나를 두고 온갖 가설을 만들게 했으며, 저 역시 121회를 밤을 새워 가며 보게 했습니다.
결말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경험까지 없던 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완벽하게 수습한 평범한 드라마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걸 벌여놓고 결국 휘청거린 드라마가 더 오래 기억될 때도 있습니다.
《로스트》가 그렇습니다.
질문을 만드는 데는 천재였고, 답하는 데는 그만큼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명작이 될 수 있었는데 놓쳤다는 생각도 들고, 이미 충분히 명작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까지 봤습니다.
시즌 3부터는 몇 번이고 투덜거리면서도요.
보던 거니까 봤습니다.
그런데 121회를 보던 거니까 계속 보게 만들었다면,
그 '보던 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