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리터의 눈물, 짜내지 않아서 나온 눈물
울릴 작정인 제목인데, 정작 드라마는 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울었습니다.
제목부터 상당히 노골적입니다.
《1리터의 눈물》.
이 정도면 거의 예고가 아니라 선전포고입니다.
앞으로 당신을 이만큼 울릴 테니 각오하고 보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한동안 안 봤습니다.
난치병에 걸린 여고생. 실화. 일기. 스물다섯이라는 너무 이른 죽음.
이런 단어가 붙어 있으면 이야기의 방향은 시작하기도 전에 어느 정도 보입니다. 병은 악화될 것이고, 가족은 울 것이고, 친구들도 울 것이고, 보는 사람도 결국 울라고 만들어 놓았겠지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작품을 조금 경계하는 편입니다.
슬픔 자체가 싫은 건 아닙니다.
슬픈 장면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품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여기서 우세요”라고 요구하는 순간 조금 식습니다.
슬픈 음악이 커지고, 인물이 긴 독백을 시작하고, 카메라가 눈물을 오래 잡고, 주변 사람들까지 차례대로 울기 시작하면 오히려 팔짱을 끼게 됩니다.
울음을 짜내는 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리터의 눈물》도 그런 작품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막상 보기 시작한 뒤 아주 빠르게 생각을 바꿨습니다.
첫 장면부터 몰입했습니다.
이유요?
사와지리 에리카가 너무 예뻤습니다.
네.
감동보다 얼굴이 먼저였습니다.
시작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끝날 때쯤에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꺼이꺼이.
제목이 괜히 《1리터의 눈물》은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요.
문제는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가 저를 그렇게까지 울리려고 덤볐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원작이 실화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
이 작품의 바탕은 기토 아야라는 실존 인물이 남긴 일기입니다.
열다섯 살에 척수소뇌변성증을 앓기 시작했고, 병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삶과 생각을 기록했습니다.
그 일기가 책으로 나왔고, 이후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드라마는 2005년 후지TV에서 11부작으로 방영됐고, 사와지리 에리카가 아야 역을 맡았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감정을 과장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건 실제 있었던 일이니까 더 슬퍼해야 합니다.”
그렇게 밀어붙이는 것도 가능했겠죠.
그런데 《1리터의 눈물》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병이 악화되면 악화되는 대로 보여주고, 몸이 불편해지면 불편해지는 대로 보여줍니다.
아야가 넘어지고.
걷기가 어려워지고.
말하는 일이 힘들어지고.
예전에는 자연스럽던 일이 하나씩 자연스럽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사건을 한 번 더 얹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상황 위에 또 다른 불행을 억지로 올려놓고 “이래도 안 울 거냐”고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이 점점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최루성 드라마가 맞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최루성 드라마라는 말을 한다면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아주 많이 웁니다.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다만 흔히 말하는 ‘최루성’과는 조금 다릅니다.
보통 눈물을 짜내는 작품은 감정을 계속 쌓습니다.
이 정도면 슬프죠?
그래도 부족하면 이것도 드릴게요.
여기에 가족의 눈물.
친구의 눈물.
슬픈 음악.
회상 장면.
유언 비슷한 대사까지.
그렇게 감정 위에 감정을 계속 올립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저는 안 울게 됩니다.
작품이 저보다 먼저 울고 있으니까요.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1리터의 눈물》은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아야가 슬프다고 해서 매번 울지 않습니다.
가족들도 하루 종일 비극적인 얼굴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웃기도 하고.
밥도 먹고.
아빠는 농담도 합니다.
평범한 하루가 계속됩니다.
그 평범함 한가운데 조금씩 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보는 사람이 먼저 압니다.
아.
이제 이건 못 하겠구나.
저것도 마지막이겠구나.
다음에는 더 어려워지겠구나.
드라마가 설명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버립니다.
그게 힘듭니다.
울라고 시키지 않으니까 알아서 울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제목의 1리터는 드라마가 짜낸 눈물의 양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진해서 낸 양이었습니다.
요구하지 않으니까 냈습니다.
억지로 걷어갔다면 아마 안 냈을 겁니다.
긍정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또 하나는 긍정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이런 소재를 가진 드라마라면 굉장히 쉽게 교훈적인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힘들어도 웃어야 한다.
오늘 하루에 감사해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말만 떼어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계속 들으면 피곤합니다.
특히 정말 힘든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만큼 잔인한 조언도 드뭅니다.
긍정할 힘조차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1리터의 눈물》은 그 말을 직접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야가 항상 밝은 것도 아닙니다.
왜 자신이 이런 병에 걸렸는지 원망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달라지는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가족에게 짐이 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을 없애지 않습니다.
당연한 슬픔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긍정이 보입니다.
긍정적인 사람이란 매일 웃는 사람이 아니라, 울고 화내고 절망하면서도 다음 날을 살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것도 눈물과 똑같습니다.
긍정하라고 하지 않으니까 긍정을 보게 됩니다.
교훈을 들이밀지 않으니까 제가 알아서 받아갑니다.
이 드라마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고 나면 결국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병은 그 사람 한 명에게만 오는 게 아닙니다.
가족 전체의 생활이 바뀝니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면서도 자기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고, 형제자매는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불편함과 질투를 느낄 수 있습니다.
《1리터의 눈물》은 이런 감정까지 지나치게 깨끗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 완벽하게 헌신적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안 힘든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아빠가 기억에 남습니다.
진나이 타카노리가 연기한 아버지는 꽤 코믹합니다.
말도 많고, 반응도 크고, 어떤 장면에서는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웃기지 않습니다.
그 균형이 좋았습니다.
아버지 캐릭터가 계속 울기만 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웃기고 떠들다가 정말 필요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사람도 원래 그렇습니다.
가족이 아프다고 해서 하루 종일 울 수는 없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농담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사소한 순간에 현실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이 더 아픕니다.
사와지리 에리카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
그리고 아무리 감동적인 작품이라도 제 감상에서 이 얘기를 뺄 수는 없습니다.
사와지리 에리카.
정말 예뻤습니다.
첫 장면부터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면 묘하게 한국 배우들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송윤아 같고.
어떤 각도에서는 김희선 같고.
또 어느 순간에는 한예슬이 보이는 것 같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다른 얼굴이 튀어나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저 혼자 하는 도플갱어 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주인공만 그런 게 아닙니다.
엄마 역의 야쿠시마루 히로코를 보고 있으면 이보희가 떠올랐고, 아빠 진나이 타카노리는 볼 때마다 주윤발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작품의 감동과 별개로,
“이번 장면에서는 누구 닮았지?”
이러고 있었습니다.
눈물바다 한가운데서 사람 닮은꼴 찾고 있는 시청자.
저도 제가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그래도 이런 사소한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작품이 더 견디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계속 울기만 하면 보는 사람도 지칩니다.
《1리터의 눈물》은 생각보다 웃을 틈이 있고, 사람을 편하게 보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슬픔이 왔을 때 더 세게 들어옵니다.
남자 주인공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아소 하루토 역의 니시키도 료.
이쪽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캐릭터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아야를 특별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어주고, 병 때문에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도 관계를 이어가는 인물입니다.
이런 역할은 잘만 살아나면 굉장히 강하게 기억에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연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비주얼 역시 별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절대 질투 아닙니다.
아닙니다.
여하튼 아닙니다.
특히 주변 인물들의 감정이 워낙 자연스럽게 살아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아쉬웠습니다.
이 드라마가 눈물은 그렇게 잘 끌어냈는데, 남자 주인공의 매력만큼은 끝내 제대로 짜내지 못했습니다.
그게 제게는 꽤 분명한 단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슬픔만이 아닙니다
《1리터의 눈물》을 떠올리면 당연히 울었던 기억부터 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남는 건 눈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장면들이 같이 남습니다.
학교에 가고.
가족과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것.
병에 걸리기 전에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아야가 하나씩 할 수 없게 되면서 그제야 그 평범함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가 보입니다.
이 드라마가 좋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삶이 소중하다고 크게 말하지 않습니다.
평범했던 것을 하나씩 빼버립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이 알아서 느낍니다.
아.
저게 소중했던 거구나.
또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 제가 알아서 받아갑니다.
다시 보고 싶은데, 다시 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다시 보고 싶은 일본 드라마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였습니다.
영화판도 따로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찾아봤습니다.
그만큼 작품이 남긴 감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사람도 조금 달라집니다.
당시에는 어떤 장면만 나와도 바로 눈물이 났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덜 울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거의 안 울지도 모릅니다.
감수성이 메말랐다고 하기에는 조금 억울하고, 그냥 시간이 사람한테서 가져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슬픈 장면을 너무 많이 봐서 익숙해지기도 하고.
삶에서 실제로 겪는 일이 많아지면서 허구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예전보다 슬픈 걸 더 잘 알게 됐는데 눈물은 덜 나올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강해진 건지.
무뎌진 건지.
아니면 그냥 눈물샘도 나이를 먹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2027년에 같은 인물을 다시 다루는 영화가 나온다고 합니다.
니시키도 료가 다시 아소 하루토를 맡는다고 하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같은 이름을 다시 만나는 셈입니다.
배우 때문에 기대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쪽은 제 취향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다시 《1리터의 눈물》을 본다고 해서 예전처럼 정말 1리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려울 겁니다.
그때보다 제가 덜 감동적인 사람이 돼서가 아니라,
세월이 이미 조금씩 가져간 눈물이 꽤 많아서요.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