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메 칸타빌레, 노다메가 치아키에게 한 짓을 저한테 했습니다
첫인상은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사람이 나오는 작품을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제가 처음 본 일본 드라마입니다.
일본 영화를 몇 편 보면서 특유의 분위기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던 때였고, 이제 드라마도 한번 봐볼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첫 작품을 고르는 데 꽤 오래 걸렸습니다.
기준이 좀 이상했습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찾은 게 아니라, 보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 작품을 찾았습니다.
첫 작품이 별로면 일본 드라마 전체에 흥미를 잃을 것 같았습니다. 괜히 한 작품 잘못 골랐다가 “일드는 나랑 안 맞네” 하고 끝낼 것 같았어요.
그래서 꽤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평이 좋았고,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원래 좋아했고, 당시 재미있게 봤던 《베토벤 바이러스》와 비교하는 이야기도 자주 보였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게 《노다메 칸타빌레》였습니다.
결과는 대만족.
11부작을 정말 순식간에 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면 ‘재미있었다’거나 ‘만족했다’는 말만으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이 드라마는 저한테 꽤 이상한 일을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노다메가 치아키에게 한 짓을 저한테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싫어합니다
노다 메구미, 노다메.
정리도 안 하고, 생활도 엉망이고, 행동은 종잡을 수 없고, 사람한테 거리낌 없이 달라붙습니다.
천재적인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악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피아노를 치는 방식도 정석과는 거리가 멉니다.
반면 치아키 신이치는 모든 게 반듯합니다.
실력 좋고, 잘생겼고, 야심도 있고, 클래식에 대한 기준도 높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노다메를 처음부터 좋아할 리 없습니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예측 불가능하고.
자기 세계 안으로 허락도 없이 들어옵니다.
치아키 입장에서 노다메는 매력적인 사람이기 전에 굉장히 귀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조금씩 바뀝니다.
처음에는 떼어내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줍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노다메가 없는 자리를 신경 쓰기 시작합니다.
싫었던 것이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것이 필요해집니다.
저는 이게 《노다메 칸타빌레》의 연애 이야기인 동시에 작품 자체가 관객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똑같이 당했습니다
처음 《노다메 칸타빌레》를 봤을 때 솔직히 거슬리는 게 많았습니다.
연기는 과장돼 있고, 표정은 만화 같고, 사람이 날아가고, 얻어맞으면 벽에 처박히고, 현실에서는 아무도 저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억양과 리액션이 계속 나옵니다.
애니메이션이 실사로 튀어나온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야 일본 드라마의 과장된 코미디 연출에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그때는 첫 작품이었습니다.
모든 게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우에노 주리.
처음 봤을 때 제 생각은 꽤 단순했습니다.
왜 여주인공을 좀 더 예쁜 배우로 안 했을까.
그때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그다음입니다.
거슬리는데 보기 싫지 않았습니다.
과장돼 있는데 민망하지 않았습니다.
유치하다고 느끼다가도 웃고 있었고, 웃다가 어느 순간에는 꽤 진지하게 감동받았습니다.
노다메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저 성격이 아니면 노다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얌전했어도.
조금만 예쁘게 꾸몄어도.
조금만 정상적인 로맨스 여주인공처럼 행동했어도.
아마 훨씬 재미없는 작품이 됐을 겁니다.
그리고 드라마를 다 본 뒤 저는 제가 처음에 별로라고 생각했던 우에노 주리가 나온 작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조금 웃겼습니다.
치아키도 그랬을 겁니다.
처음에는 저 여자가 왜 자꾸 붙어 있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안 보이면 신경 쓰입니다.
저도 똑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왜 하필 이 배우인가 싶었는데, 끝나고 나니 다른 작품에서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질색.
익숙함.
호감.
그리고 애정.
순서까지 비슷했습니다.
노다메는 예뻐지는 게 아니라 노다메가 됩니다
돌이켜보면 우에노 주리가 특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다메라는 인물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예뻐 보이면 오히려 안 됩니다.
이 캐릭터에게 중요한 건 미모가 아니라 생명력입니다.
방 안은 엉망이고, 행동도 엉망이고, 말하는 것도 엉망인데 피아노 앞에 앉으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간극이 커야 합니다.
우에노 주리는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해냈습니다.
코믹한 장면에서는 망가지는 데 주저함이 없고, 음악이 시작되면 얼굴 전체가 바뀝니다.
노다메가 천재라는 걸 대사로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의 온도가 달라져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예쁜가 안 예쁜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노다메인지 아닌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끝까지 보고 나면 이 배우 말고 다른 사람을 넣는 장면이 잘 상상되지 않습니다.
첫인상과 마지막 인상이 이렇게 달라지는 배우도 흔치 않습니다.
그 자체로 이 드라마가 저한테 한 일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치아키는 처음부터 치아키였습니다
반면 타마키 히로시는 처음부터 편했습니다.
이상하게 친밀감이 있었습니다.
치아키라는 캐릭터는 잘못하면 굉장히 재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잘생겼고, 집안 좋고, 실력 좋고, 자기 기준 높고, 남의 연주를 쉽게 평가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비호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마키 히로시는 그걸 묘하게 넘깁니다.
멋있을 때는 확실히 멋있고, 망가질 때는 또 제대로 망가집니다.
노다메에게 휘둘리면서도 치아키라는 캐릭터의 품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게 좋았습니다.
간지와 코미디 사이를 계속 오가는데 어느 쪽으로 가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코미디가 워낙 강해서 남자 주인공까지 같이 붕괴해버리면 중심을 잡을 사람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치아키는 계속 망가지면서도 마지막 선은 지킵니다.
그래서 노다메가 마음껏 날뛸 수 있습니다.
한쪽은 엉망이어야 하고, 한쪽은 그 엉망을 견뎌야 합니다.
그 균형이 아주 좋습니다.
슈트레제만은 좀 심한데, 또 없으면 안 됩니다
타케나카 나오토가 연기한 슈트레제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처음 보면 이 사람은 정말 과합니다.
아니, 이 작품 전체가 과한데 그중에서도 유독 더 과합니다.
표정도.
행동도.
말투도.
모든 게 너무 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지나면 적응합니다.
이 작품이 참 무서운 게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까지 하지” 싶었던 것들이 몇 회 지나면 기본값이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오히려 그 사람이 덜 과장하면 이상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배우에 비유하자면 백윤식처럼 느껴졌습니다.
등장하는 순간 장면의 공기가 달라지고, 정극과 코미디 사이를 자기 마음대로 오가는 감초.
이런 배우가 한 명 있으면 작품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특히 《노다메 칸타빌레》처럼 현실과 만화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작품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삼각관계가 시작되는 줄 알았습니다
미즈카와 아사미가 연기한 미키 키요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삼각관계구나.
한국 드라마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거의 자동반사에 가까운 예상이었습니다.
남자 주인공과 잘 어울리는 새로운 여자.
능력도 있고.
외모도 좋고.
주인공과 같은 클래식 세계에 있고.
이쯤 되면 노다메와 경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땡.
그런 방향으로 안 갑니다.
저한테는 이것도 꽤 신선했습니다.
굳이 모든 인물을 연애 관계로 얽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질투하고, 오해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고, 각자의 길이 따로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첫 일본 드라마로 본 덕분에 저는 한동안 일본 드라마가 원래 다 이런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꽤 큰 편견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편견이었습니다.
적어도 다음 작품을 볼 때 불필요한 막장 관계를 걱정하지 않게 해줬으니까요.
음악이 있어서 가능한 과장이었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단순히 캐릭터 코미디였다면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작품의 중심에는 음악이 있습니다.
코미디가 아무리 과해도 연주 장면에 들어가면 작품의 온도가 바뀝니다.
장난처럼 보였던 인물들이 음악 앞에서는 진지해집니다.
그 순간 이전의 과장된 연출이 오히려 효과를 냅니다.
계속 웃기기만 했던 사람이 진지해질 때 그 진지함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노다메와 치아키가 서로에게 끌리는 것도 결국 음악을 통해서입니다.
성격만 보면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두 사람인데, 서로가 가진 재능을 먼저 알아봅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기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관계가 좋았습니다.
사랑해서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다 보니 사랑이 생기고,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음악을 붙잡지도 않습니다.
특히 치아키가 노다메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과정은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재미가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자기 옆에 두는 것과, 그 사람이 더 멀리 가게 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노다메 칸타빌레》는 그 차이를 꽤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첫 일드는 결국 기준이 됩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 다른 일본 드라마를 고르는 일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처음에는 한 작품 고르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그다음부터는 크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한 편 더.
또 한 편 더.
그렇게 꽤 많은 작품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노다메 칸타빌레》는 제게 좋은 드라마 한 편 이상이었습니다.
문이었습니다.
동시에 편견이기도 했습니다.
첫 작품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일본 드라마는 원래 다 이런 줄 알았습니다.
과장된 연기.
빠른 코미디.
담백한 관계.
독특한 캐릭터.
물론 이후에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그 생각은 많이 깨졌습니다.
일본 드라마라고 전부 《노다메 칸타빌레》 같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첫 경험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처음 만난 것이 기준이 됩니다.
좋든 싫든.
그 뒤에 만나는 것들을 계속 그 기준에 대보게 됩니다.
그래서 첫사랑과 비슷합니다.
첫사랑이 최고의 사람이라서 오래 기억되는 건 아닐 겁니다.
그 사람을 만난 뒤 사랑이라는 것의 모양을 처음 만들었기 때문에 오래 남는 거겠죠.
저한테 일본 드라마의 첫 모양은 《노다메 칸타빌레》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기가 조금 무섭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는 아쉬워서 이어지는 작품들도 봤습니다.
최종악장까지 따라갔습니다.
끝까지 봤는데도 이상하게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
음악도 더 듣고 싶었고.
그 사람들이 한 번만 더 모였으면 했습니다.
이렇게 좋아했던 작품이면 다시 보면 되는데,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과 비슷한 기분입니다.
기억 속에서는 너무 좋은데,
다시 만나면 달라져 있을까 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품이 달라질까 봐가 아닙니다.
제가 달라졌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그때는 그렇게 웃겼던 장면이 지금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과장이 지금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렇게 좋아했던 인물이 지금은 별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 서운할 것 같습니다.
작품한테가 아니라 예전의 저한테.
그래서 첫사랑은 가끔 다시 만나는 것보다 기억 속에 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렇게 써놓고 언젠가는 또 볼 것 같습니다.
노다메가 그랬으니까요.
처음에는 귀찮고, 시끄럽고, 부담스러운데,
한 번 익숙해지고 나면 생각보다 오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도 그랬습니다.
끝난 지 오래됐는데,
저한테는 아직도 조금 ~ing입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