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울지 못하게 만드는 드라마
눈물은 출구인데, 이 드라마는 그 출구를 좀처럼 열어주지 않습니다.
1989년 4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여성이 끔찍한 폭행을 당합니다.
그날 밤 공원에 있던 흑인과 히스패닉계 소년 다섯 명이 경찰에 붙잡힙니다.
열넷에서 열여섯.
아직 어립니다.
물리적인 증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밤새 이어진 취조 끝에 자백이 나옵니다.
서로 말이 맞지도 않고, 사건의 세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자백이라는 형태는 남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섯 명 모두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넷은 소년원에서 6~7년을 보내고, 성인으로 재판받은 코리 와이즈는 약 13년을 교도소에서 보냅니다.
2002년.
다른 범죄로 복역 중이던 마티아스 레예스가 자신이 단독범이라고 자백합니다.
DNA까지 일치합니다.
그제야 다섯 명의 유죄 판결은 취소됩니다.
넷플릭스가 이 사건을 4부작으로 만든 작품이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입니다.
에이바 듀버네이가 각본과 연출을 맡았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사실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억울한 누명.
강압적인 수사.
강요된 자백.
잘못된 판결.
그리고 한참 뒤에야 밝혀지는 진실.
비슷한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러 번 봤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실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저는 결말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진범인지도 알고.
소년들이 결국 풀려난다는 것도 알고.
무슨 반전이 기다리는 작품도 아닙니다.
그런데 몰입도는 상당했습니다.
4부작을 그대로 봤고, 이어서 실제 다섯 명과 배우들이 함께 나온 오프라 윈프리 프로그램까지 찾아봤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연출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제 감상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거의 울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안 났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라면 당연히 울 것 같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억울하게 끌려가고.
경찰에게 몰아붙여지고.
부모조차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류에 서명하고.
재판에서 유죄가 나오고.
인생 전체가 망가집니다.
특히 코리 와이즈의 이야기는 보면서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안 났습니다.
대신 답답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구마를 한 백 개쯤 먹은 느낌.
물을 찾고 싶은데 물도 없습니다.
‘억울하겠다’ 정도의 말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안쪽에 있는 감정이었습니다.
분노라고 하기에도 조금 다르고.
슬픔이라고 하기에도 다릅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눈물은 출구입니다.
감정이 너무 커졌을 때 몸이 밖으로 빼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출구를 안 줍니다.
저는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이 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자백이 엉터리라는 것도 압니다.
경찰과 검찰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13년 뒤에는 진범이 나타날 거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화면 속 취조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말을 맞추려고 애쓰지 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들에게 그 서류에 서명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배심원에게 증거가 없다고 소리칠 수도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정답을 알고 있는데,
정답을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오답을 고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모르면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알면 말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알고도 말릴 수 없으면 남는 건 무력감입니다.
슬픔은 울고 나면 조금 빠집니다.
분노도 욕이라도 하면 조금 나갑니다.
무력감은 이상하게 안 나갑니다.
그냥 안에 쌓입니다.
그래서 저한테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의 네 시간은 눈물이 아니라 고구마였습니다.
하나씩 목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오프라 쇼에서 울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난 뒤 《Oprah Winfrey Presents: When They See Us Now》를 봤습니다.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실제 사건의 당사자였던 다섯 명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를 네 시간 보는 동안 그렇게 안 나오던 눈물이었습니다.
중간중간 계속 났습니다.
왜 여기서야 울었을까.
같은 사건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드라마보다 훨씬 차분합니다.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처음으로 출구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과거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취조는 이미 끝났고.
그 판결도 이미 내려졌고.
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프라 쇼에는 그 사람들이 지금 살아서 앉아 있습니다.
말합니다.
웃기도 합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설명합니다.
화면 안에서 고통받던 아이가 실제 성인이 되어 제 앞에 있습니다.
그 순간 네 시간 동안 막혀 있던 감정이 처음으로 갈 곳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못 울고 토크쇼에서 울었다는 게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드라마는 고통이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쇼는 그 고통을 지나 살아남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시간입니다.
희망적인 해피엔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13년은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소년 시절도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 감정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신다면 가능하면 그 프로그램까지 이어서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드라마만 끝내면 정말 물 없이 고구마를 삼키고 끝나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눈물이 빠지고 나니 질문이 남았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울고 나면 조금 편해질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답답함은 조금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질문들이 남았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 때문에 이 작품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목은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입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보느냐는 말입니다.
경찰이 소년들을 바라봅니다.
검사가 바라봅니다.
언론이 바라봅니다.
시민들이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습니다.
어린 흑인 남자아이들.
밤.
센트럴파크.
무리.
폭력.
그 몇 가지 조각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저 아이들이 했을 것이다.’
그 시선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작품을 다 보고 나니 제목이 저한테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럼 나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만약 백인이었다면
가장 먼저 든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다섯 명이 백인 소년들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경찰은 같은 속도로 용의자로 단정했을까.
언론은 같은 단어를 썼을까.
사람들은 똑같이 믿었을까.
아마 많은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답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내면 너무 편합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나쁘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화면을 끄면 저는 꽤 안전한 자리에 남습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싶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비슷한 일은 많았습니다.
잘못된 수사.
강압적인 자백.
사회적 편견.
범인으로 몰린 약자.
나중에 뒤집힌 판결.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먼 나라의 이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몰입했을까.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미국이라는 거리 덕분에 오히려 안전하게 분노할 수 있었던 걸까.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의 모든 행동까지 무죄였을까
여기서 조금 불편한 질문도 생깁니다.
그 다섯 명은 강간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였습니다.
그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공원에서 여러 청소년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폭행한 일까지 전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경찰은 그들에게 ‘와일딩’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이 단어 자체에도 당시의 인종적 편견과 선정적인 분위기가 들어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 밤에 벌어진 다른 행동까지 전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질문이 복잡해집니다.
만약 제가 그날 밤 다른 폭행의 피해자였다면 어땠을까요.
나중에 저 다섯 명이 강간 사건에서는 무죄였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서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증거와 상관없이 미워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생긴 편견은 완전히 부당한 것일까요.
어디까지가 경험이고.
어디서부터가 편견일까요.
편견은 무조건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경험을 가지고 다음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 판단이 생존에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판단이 어느 순간 사람을 사실보다 먼저 규정한다는 겁니다.
그 선을 어디에서 그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부모였다면 어땠을까
또 하나.
내 자식이었다면 어땠을까.
취조실에 앉아 있는 아이가 내 아이였다면.
경찰이 “사실대로 말하면 집에 보내주겠다”고 했다면.
아이의 말과 경찰 말을 놓고 무엇을 믿었을까요.
무조건 아이를 믿었을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도 상황을 모릅니다.
법도 모릅니다.
수사 방식도 모릅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앞에서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당황합니다.
겁이 납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은 들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무지한 사람은 이런 순간에 너무 불리합니다.
돈이 없고.
법을 모르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작으면 더 불리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무지한 약자는 결국 언제나 손해만 보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너무 자주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게 참 답답합니다.
편견은 가족 안에도 있었습니다
더 불편했던 건 피해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서로에게 관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같은 고통을 겪는 가족 안에서도 편견이 생깁니다.
같은 약자라고 해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안의 기준으로 또 다른 사람을 재단합니다.
이 부분이 꽤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편견이라는 걸 단순히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행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문제는 쉬워집니다.
악당 하나를 정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줍니다.
차별받은 사람도 다른 기준으로 누군가를 차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를 개인 몇 명의 악의로 정리하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 자체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저도 심판석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회적 죗값은 언제 끝나는가
형기를 마치고 나온 뒤의 이야기도 답답했습니다.
법적으로는 형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죗값은 끝나지 않습니다.
전과자가 되고.
직업을 구하기 어렵고.
주변 사람의 시선이 달라지고.
집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집니다.
특히 이 사건에서는 그 죄 자체가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이미 치른 사회적 처벌은 누가 돌려줄까요.
교도소에서 보낸 시간은 배상금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요.
젊은 시절은 얼마일까요.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은 얼마일까요.
억울하게 범죄자라고 불린 기억은 얼마입니까.
돈으로 보상하는 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돈이 해결하는 건 손해의 일부일 뿐입니다.
시간은 반환이 안 됩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잔인한 건 결국 그 부분 같습니다.
사실이 바로잡혔다는 해피엔딩 뒤에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죄 판결로도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정답이 나왔는데도 답답합니다.
그리고 제일 불편한 질문
결국 마지막에는 질문이 저한테 돌아왔습니다.
나는 편견에서 자유로운가.
답은 아마 아닐 겁니다.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외모를 보고.
말투를 보고.
옷을 보고.
직업을 듣고.
사는 곳을 듣고.
학력을 듣고.
몇 개의 정보만으로 머릿속에서 사람을 대충 분류합니다.
저 역시 그럽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판단이 틀렸는지 확인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자주 잘못 판단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더 무서운 건 그겁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본인은 그냥 ‘경험상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장들이 쌓이면 사람 하나를 너무 쉽게 범인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를 보며 분노했던 저 역시 같은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실은 언제까지 진실일까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언제까지 진실일까요.
당시 수사기관도 자기들이 진실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검찰도 그랬을 겁니다.
배심원도 유죄라고 믿었습니다.
언론도 그 이야기를 퍼뜨렸고.
많은 시민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확신하는 수많은 일 가운데도 언젠가 틀렸다고 밝혀질 것이 있을 겁니다.
그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갑자기 무서워집니다.
그렇다고 아무 판단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뉴스를 보고.
사건을 보고.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계속 판단합니다.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거짓말하는지.
누구 말을 믿어야 하는지.
판단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신의 속도를 조금 늦출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제가 가져온 게 있다면 아마 그 정도입니다.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라는 거창한 결론은 못 내리겠습니다.
저도 계속 판단하며 살 테니까요.
대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 오래 붙잡고 있어야겠다.
그 정도입니다.
여전히 답은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는 굉장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몰입도도 높고.
연출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특히 코리 와이즈의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작품을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감동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감동할 틈을 주지 않아서입니다.
울고 끝내게 하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끝내게 하지도 않습니다.
계속 질문을 남깁니다.
제목은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인데,
끝까지 보고 나면 질문은 거꾸로 돌아옵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볼 때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나.
인종을 봤는지.
범죄자를 봤는지.
피해자를 봤는지.
불쌍한 사람을 봤는지.
혹은 내가 보고 싶었던 것만 봤는지.
아직 답을 못 냈습니다.
아마 쉽게 못 낼 것 같습니다.
오프라 쇼까지 보고 나니 고구마 백 개는 조금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질문들은 여전히 남았습니다.
한두 개가 아닙니다.
계속 더부룩합니다.
이 질문들이 언젠가 완전히 소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끝까지 소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더부룩함을 조금씩 달고 살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눈물보다 그게 더 오래 남았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