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 자막을 못 따라가는데 왜 빨려들었을까
내용을 전부 이해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속도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빠져들었습니다. 시즌 1만큼은요.
《뉴스룸》은 호불호가 꽤 갈리는 드라마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호였습니다.
그것도 적당히 재미있었다는 정도의 호가 아니라, 거의 블랙홀에 빨려들어 간 쪽에 가까웠습니다.
시즌 1 열 편을 정말 일사천리로 봤습니다. 한 편 끝나면 바로 다음 편으로 넘어갔고, 다 보고 나서는 시즌 2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시즌 1을 다시 볼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봤던 미드 가운데 시즌 1만 놓고 몰입도를 따지라면 지금도 《뉴스룸》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이 드라마는 보기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대사가 너무 빠릅니다.
정말 빠릅니다.
자막을 읽다가 화면을 놓치고, 화면을 보다가 자막을 놓칩니다. 한 문장이 끝났나 싶으면 다음 문장이 이미 두 줄쯤 지나가 있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말을 빨리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장마다 정보가 있고, 비꼼이 있고, 논쟁이 있고, 촌철살인이 있습니다.
작가가 애런 소킨입니다.
한국 작가에 굳이 비유하자면 스타성과 대사빨은 김은숙인데, 말의 밀도와 문장 리듬은 김수현처럼 느껴집니다.
쉬지 않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는 쉬지 않고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미국 정치 이야기까지 계속 나옵니다.
한국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100%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미국 정치권의 맥락이나 언론 환경을 알아야 더 잘 보이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빨려들었습니다.
내용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면 답은 단순합니다.
제가 빨려든 건 내용만이 아니었습니다.
속도였습니다.
《뉴스룸》은 뉴스처럼 달립니다
《뉴스룸》의 배경은 가상의 케이블 뉴스 채널 ACN입니다.
앵커 윌 맥어보이와 총괄 프로듀서 맥켄지 맥헤일, 그리고 기자와 제작진들이 뉴스를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시즌 1에서는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같은 사건들입니다.
시청자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막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정확한지 확인해야 하고, 취재원을 확보해야 하고, 방송에 내보낼지 판단해야 하고, 잘못된 정보라면 걸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몇 시간 안에 해야 합니다.
그러니 느리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명이 정보를 들고 뛰어오면 다른 사람이 확인하고, 그걸 또 다른 사람이 반박하고, 누군가는 전화기를 붙잡고 취재원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방송 원고를 고칩니다.
《뉴스룸》 시즌 1의 좋은 장면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뭔가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움직입니다.
말하고, 확인하고, 지우고, 고치고, 다시 말합니다.
그래서 대사가 빠른 겁니다.
처음에는 그게 애런 소킨 특유의 대사 스타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빠른 대사가 내용과 너무 잘 맞습니다.
뉴스룸 안에서 정보가 그 속도로 움직이니 드라마도 같은 속도로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시청자에게도 그대로 퍼붓습니다.
이 드라마는 친절하게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셨죠?”
그런 시간이 없습니다.
그냥 다음 정보가 옵니다.
그래서 웃기게도 자막을 따라가기 힘든데 몰입이 됩니다.
이해가 부족해서 멈추는 게 아니라,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끌려갑니다.
평소라면 단점일 수 있는 요소가 여기서는 추진력이 됩니다.
저는 미국 정치를 다 몰라도 됐습니다.
뉴스를 둘러싼 구체적인 논쟁을 하나하나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도 됐습니다.
저 사람들이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일을 아주 빠른 속도로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으니까요.
내용은 70% 따라가도 됩니다.
리듬은 100% 따라갑니다.
그게 시즌 1의 힘이었습니다.
제가 법정물과 의학물을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저는 원래 법정물이나 의학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 작품들을 볼 때 법률 지식이나 의학 지식을 완벽하게 알아듣는 건 아닙니다.
전문용어가 나오면 놓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기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쓰고, 경험 많은 사람이 결정을 하고, 여러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는데 결국 하나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 하모니가 좋습니다.
《뉴스룸》 시즌 1도 똑같았습니다.
기자 한 명이 모든 걸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앵커가 혼자 영웅이 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소스를 가져오고, 누군가는 사실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방송 여부를 결정하고,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 앉습니다.
뉴스 하나를 제대로 내보내기 위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긴장감이 됩니다.
그래서 시즌 1을 보면서 저는 뉴스를 본 게 아니라 프로들이 일하는 걸 봤습니다.
잘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일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재미있습니다.
윌 맥어보이, 그리고 맥켄지 맥헤일
주인공 윌 맥어보이는 제프 다니엘스가 연기합니다.
당시에 누가 이 배우가 《덤 앤 더머》 주인공이라고 알려줘서 꽤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제대로 본 기억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제 머릿속 제프 다니엘스는 그냥 윌 맥어보이였습니다.
앵커 데스크에 앉아 날카롭게 질문하고, 불편한 말을 거리낌 없이 던지고, 자기 기준에서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사람.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당시 제가 보기에는 손석희 같은 느낌도 있었습니다.
앵커라는 직업 자체가 주는 무게와, 말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힘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맥켄지 맥헤일 쪽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에밀리 모티머.
이 배우가 이렇게 매력적인 배우였나 싶었습니다.
영국식 억양 자체가 원래 제 취향이기도 했지만 그걸 떠나서 이 작품에서는 사람이 정말 살아 있습니다.
나중에 출연작을 찾아보니 《노팅힐》, 《매치 포인트》, 《셔터 아일랜드》, 《휴고》까지 제가 본 작품에 여럿 나왔더군요.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뉴스룸》에서는 확실하게 각인됐습니다.
다른 영화에서는 스쳐 지나갔던 배우가 여기서는 보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 이것도 역시 속도와 연결됩니다.
맥켄지는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뉴스룸 안에서 미친 듯이 움직이고 말할 때 가장 매력적입니다.
소리치고, 지시하고, 실수하고, 수습하고, 또다시 지시합니다.
그 속도 안에 들어갔을 때 에밀리 모티머라는 배우가 확 살아납니다.
문제는 뉴스룸을 벗어날 때입니다
그렇게 좋았던 드라마인데 시즌 2와 시즌 3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시즌 1은 10부작.
시즌 2는 9부작.
시즌 3는 6부작.
편수도 계속 줄었습니다.
물론 편수가 줄었다고 작품의 질이 자동으로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뉴스룸》은 확실히 시즌이 갈수록 힘이 빠졌습니다.
특히 조연들의 애정라인.
정말 짜증났습니다.
시즌 2로 가면 그 짜증이 더 커집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냥 러브라인을 싫어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연애 이야기도 잘 봅니다.
오히려 좋아할 때도 많습니다.
문제는 《뉴스룸》에서 사랑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드라마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진다는 데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
누가 고백을 못 한다.
누가 누구 때문에 상처받았다.
그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뉴스를 만들지 않습니다.
멈춰서 감정을 확인합니다.
당연히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연애가 뉴스 속도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좋아한다는 감정도 몇 시간 안에 팩트체크할 수 없고, 오해가 생겼다고 속보 자막 띄운 뒤 정정 방송으로 끝낼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그 뉴스 속도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물의 감정으로 들어갈수록 오히려 드라마가 자기 장점을 잃었습니다.
사랑 이야기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이 작품과 잘 안 맞았습니다.
뉴스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뉴스룸을 나가면 갑자기 모든 것이 늘어집니다.
저한테는 그 차이가 꽤 컸습니다.
시즌 1은 실제 사건이 엔진이었습니다
시즌 1은 실제 사건들이 끊임없이 드라마를 앞으로 밀어붙입니다.
뉴스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금 들어온 정보를 몇 분 안에 확인해야 합니다.
결정을 미뤘다가는 다른 방송사가 먼저 내보냅니다.
틀리면 사고입니다.
늦어도 사고입니다.
그러니 계속 뛰어야 합니다.
그런 사건들이 시즌 1 전체의 엔진이었습니다.
반면 후반 시즌으로 갈수록 저는 그 엔진이 약해졌다고 느꼈습니다.
뉴스가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힘보다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와 감정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집니다.
그 순간 《뉴스룸》이 다른 드라마들과 비슷해집니다.
이건 꽤 치명적입니다.
《뉴스룸》의 가장 좋은 순간은 다른 드라마처럼 보이지 않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대사를 따라가기 벅차고,
미국 정치라 잘 모르겠고,
한 장면에 정보가 너무 많이 들어오는데,
그래도 눈을 못 떼게 만드는 것.
그게 이 작품의 개성이었습니다.
쉬워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빨라야 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도 이해는 됩니다
이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애런 소킨 특유의 대사가 피곤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인물들이 모두 너무 똑똑하게 말합니다.
현실에서 그렇게 완벽한 문장을 즉석에서 쏟아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합니다.
누군가 질문하면 상대는 이미 3초 뒤에 인용될 만한 답변을 준비한 것처럼 말합니다.
때로는 사람이 이야기한다기보다 작가가 사람 입을 빌려 연설한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더 멀게 느껴질 겁니다.
저 역시 내용 전체에 공감한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즌 1은 좋았습니다.
그 과함이 작품의 속도와 맞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대화는 아닐지 몰라도 뉴스룸이라는 공간의 긴박함에는 어울렸습니다.
말을 천천히 했다면 오히려 덜 재미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시즌 1의 과잉은 단점이면서 동시에 장점이었습니다.
애런 소킨이 너무 많이 써서 문제인데, 저는 그 너무 많은 걸 따라가느라 재미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드라마입니다.
시즌 1까지만 추천합니다
《뉴스룸》 전체를 놓고 보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시즌 2와 3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힘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 작품을 추천하느냐고 물으면 저는 추천합니다.
대신 조건을 하나 붙입니다.
시즌 1은 꼭 보세요.
그 뒤는 선택입니다.
시즌 1에서 이미 이 작품이 가장 잘하는 걸 거의 다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이 뛰고.
전화기가 울리고.
대사가 겹치고.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마침내 방송이 시작됩니다.
그 과정이 너무 좋았습니다.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자막을 다 읽지 못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오히려 다 따라잡을 수 없어서 더 몰입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뉴스는 원래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뉴스룸》 시즌 1도 그랬습니다.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달렸습니다.
저는 뒤에서 정신없이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시즌 2부터 그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을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제가 좋아한 건 멋진 연설도, 미국 정치도, 거창한 저널리즘의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뉴스가 들어왔을 때 그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였습니다.
시즌 2와 3에서 무대가 조금 기울고 넘어졌다고 해도 시즌 1의 공연까지 나빠지는 건 아닙니다.
그 연극은 이미 한 번 제대로 올라갔습니다.
저한테는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아니,
시즌 1만 다시 보면 아직도 조금 빠릅니다.
자막도 여전히 벅찹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