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리스트, 범인이 누구든 상관없어진 드라마
레드 존은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드라마를 7시즌이나 애정했습니다.
《멘탈리스트》를 현대판 셜록이라고 부르면 조금 과한 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둘을 굳이 한 줄 위에 세워놓는다면 닮은 구석은 분명 있습니다.
둘 다 사람을 읽습니다.
표정, 손짓, 말버릇, 시선이 머무는 곳.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만한 사소한 흔적을 보고 상대가 무엇을 숨기는지 알아냅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셜록은 사람을 읽고 내려다봅니다. 패트릭 제인은 사람을 읽고 홀립니다.
이 차이가 꽤 큽니다.
제인은 범인을 잡을 때조차 어딘가 장난을 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남의 사무실 소파에 제집처럼 드러누워 있고, 차를 마시다가 툭 한마디 던지고, 멀쩡하던 용의자를 몇 분 만에 발끈하게 만듭니다. 상대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본인은 웃고 있습니다.
얄미운데 미워하기 어렵습니다.
잘난 척하는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습니다.
그게 패트릭 제인의 가장 큰 재능이고, 이 드라마가 7시즌을 버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큰 사건 하나, 그리고 수많은 별개의 사건
《멘탈리스트》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패트릭 제인은 한때 사람의 심리를 읽는 능력을 이용해 심령술사 행세를 하던 사람이었고, 방송에서 연쇄살인범 레드 존을 도발했다가 아내와 딸을 잃습니다.
이후 그는 수사기관에 자문 역할로 붙어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 뒤에는 레드 존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게 드라마의 거대한 축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매회 벌어지는 사건 대부분은 레드 존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살인 사건이 생기고, 제인이 현장에 나타나고, 주변 사람을 건드려 보고, 거짓말을 골라내고, 결국 범인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런 방식의 수사물은 자칫 지루해지기 쉽습니다.
메인 스토리가 계속 제자리걸음이면 보는 사람은 답답하고, 반대로 매주 독립적인 사건만 반복하면 어느 순간 모든 에피소드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멘탈리스트》는 꽤 오래 그 문제를 피해 갑니다.
이유는 사건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패트릭 제인이 특별해서입니다.
정확히는, 패트릭 제인은 아무 사건에나 집어넣어도 장면을 만들어내는 캐릭터입니다.
살인범 앞에 앉혀놔도 재미있고, 피해자 가족과 이야기해도 재미있고, 경찰과 실랑이를 해도 재미있고, 지나가던 사람 하나 붙잡고 몇 마디 나눠도 재미있습니다.
누구와 붙여놔도 상대를 흔듭니다.
그런 면에서는 셜록보다 훨씬 편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셜록은 그 강한 개성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왓슨이든, 레스트레이드든, 마이크로프트든, 모리아티든 누군가는 그의 기괴함을 감당해줘야 합니다.
제인은 다릅니다.
혼자서도 장면이 돌아갑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상대가 강하면 가지고 놀고, 약하면 달래고, 거짓말하면 찌르고, 화를 내면 더 건드립니다.
그래서 에피소드가 반복되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사건은 매번 바뀌지만 결국 제가 보고 있었던 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제인이 사람을 어떻게 가지고 놀까.
그게 궁금했습니다.
레드 존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결국 레드 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즌이 이어질수록 레드 존의 존재는 점점 커집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주변의 누가 그의 편인지 끊임없이 떡밥이 쌓입니다.
당시 이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범인이 누구냐는 이야기가 꽤 많았습니다.
저도 당연히 궁금했습니다.
6시즌 가까이 끌고 온 인물인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런데 막상 정체가 밝혀졌을 때 제 감정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충격적이지 않았습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 이 사람이구나.
그 정도였습니다.
몇 년을 끌어온 최종보스 치고는 참 소박한 감정이었습니다.
보통 이쯤 되면 드라마를 탓하게 됩니다.
이렇게 오래 끌었으면 최소한 의자에서 한 번은 일어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뒷통수라도 제대로 한 번 맞은 기분이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레드 존의 정체가 기대만큼 충격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멘탈리스트》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드라마의 중심은 애초부터 레드 존이 아니었습니다.
패트릭 제인이었습니다.
궁금했던 건 범인이 아니라 제인이었습니다
레드 존은 제인의 가족을 죽였습니다.
제인이 웃고 다니는 이유도, 그 웃음 뒤에서 계속 무너져 있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습니다.
평소의 제인은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사건 현장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권위 있는 사람 앞에서도 눈치를 보지 않고, 살인범과 마주 앉아서도 농담을 합니다.
그런데 레드 존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가벼움이 사라집니다.
그 순간에야 알게 됩니다.
우리가 매주 보던 그 유쾌하고 능글맞은 얼굴이 사실은 완전히 멀쩡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레드 존은 인물이라기보다 제인의 상처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누구인지보다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제인이 아무리 웃고 사람을 놀려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과거.
그게 레드 존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레드 존의 얼굴이 공개됐을 때 충격이 작았던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린 건 사실 그 얼굴이 아니었으니까요.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제인이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
웃을까.
무너질까.
용서할까.
죽일까.
결국 범인 찾기처럼 보였던 긴 기다림도 실제로는 제인의 선택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레드 존의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드라마가 계속됐고, 저는 그 뒤도 전부 봤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답은 나와 있습니다.
정말 이 드라마의 중심이 레드 존이었다면 그가 사라지는 순간 저도 그만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그랬습니다.
계속 봤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좋아했던 건 처음부터 레드 존 미스터리가 아니었던 겁니다.
패트릭 제인이었습니다.
남자도 빠지는 남자
패트릭 제인은 여성 팬이 많은 캐릭터였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잘생겼고, 웃는 얼굴이 좋고, 말을 잘하고,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고, 무엇보다 겉으로는 가벼워 보이는데 안에는 엄청난 상처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 조합은 반칙에 가깝습니다.
겉으로 멀쩡한 사람이 사실은 가장 망가져 있다는 설정은 언제나 강합니다.
사람의 심리를 그렇게 잘 읽는 사람이 정작 자기 마음만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제인의 매력에 제대로 빠졌습니다.
아, 참고로 저는 남자입니다.
이성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도 멋있는 건 멋있는 겁니다.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패트릭 제인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사이먼 베이커의 웃는 얼굴도 큰 몫을 했겠지만, 그 캐릭터가 가진 묘한 균형이 좋았습니다.
능글맞은데 가볍지만은 않고, 천재적인데 차갑지 않고, 비극적인데 계속 우울하지 않습니다.
보통 이런 설정을 한 캐릭터에게 몰아넣으면 과해집니다.
그런데 제인은 이상하게 과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 사람이 늘 웃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건은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멘탈리스트》를 떠올리면 개별 사건들은 의외로 많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어떤 트릭이 있었는지, 범인이 어떻게 잡혔는지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151화나 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인은 기억납니다.
소파에 누워 있던 모습.
차를 마시던 모습.
사람을 슬쩍 떠보던 표정.
리스본이 화를 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웃던 얼굴.
그런 장면들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멘탈리스트》를 아주 잘 만든 추리극이라고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완벽하게 치밀한 수사물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특히 레드 존을 둘러싼 긴 미스터리는 끌었던 시간에 비해 마지막 타격감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6시즌이나 묵혀놓고 꺼낸 카드라면 조금 더 독한 맛이었어도 됐습니다.
그건 분명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아쉬움 때문에 작품 전체의 인상이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사건보다 캐릭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캐릭터 하나가 드라마를 얼마나 오래 끌고 갈 수 있는가
《멘탈리스트》는 저한테 그런 작품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드라마도 아닙니다.
매번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주인공이 사람을 읽고, 범인을 잡습니다.
그 사이에 거대한 복수극 하나가 길게 이어집니다.
구조만 보면 익숙합니다.
그런데 패트릭 제인이라는 캐릭터 하나가 그 익숙함을 꽤 오랫동안 재미있게 만듭니다.
방송이 계속될지 불투명하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때도 저는 당연히 더 이어졌으면 했습니다.
레드 존이 이미 끝났든 말든 상관없었습니다.
다른 방송국으로 넘어가든 어디에서 만들든 별 관심 없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순했습니다.
패트릭 제인이 다시 소파에 누워 있는 것.
누군가에게 한마디 툭 던지는 것.
상대가 발끈하는데 혼자 웃고 있는 것.
그걸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시즌까지 모두 봤습니다.
7시즌, 151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 이런 드라마는 다 보고 나면 늘 똑같은 생각이 듭니다.
한 시즌만 더 했어도 봤을 텐데.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