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성교육 드라마인데 주인공이 제일 모릅니다
상담은 오티스가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상담받는 쪽은 보는 사람입니다.
넷플릭스에서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목부터 그다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뭔가 가볍고, 살짝 유치하고, 하이틴 드라마 특유의 소동극 정도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원제는 《Sex Education》.
성교육입니다.
이쪽이 훨씬 정확한 제목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원제에 끌려서 본 건 절대 아닙니다.
그 점은 먼저 확실하게 해두고 싶습니다.
실제로 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엠마 맥키.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마고 로비와 꽤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마고 로비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순수하고 학구적인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목에는 안 끌렸고, 배우 얼굴에는 끌렸습니다.
꽤 얄팍한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한 편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시즌 1 여덟 편을 그대로 봤습니다.
시작한 이유는 겉이었는데, 끝까지 본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아주 소심한 성 상담사
이 드라마의 기본 설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오티스는 성 상담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질리도록 듣고 자랐고, 집에는 일반적인 가정집이라면 조금 당황스러울 만한 물건들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론만 보면 굉장히 능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정반대입니다.
소심합니다.
찌질할 정도로 눈치를 봅니다.
연애도 서툴고 자기 감정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곧잘 분석하면서 자기 문제가 되면 완전히 엉망이 됩니다.
에이사 버터필드가 그 오티스를 연기합니다.
처음 볼 때부터 ‘참 소심해 보이게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망가뜨리면 미스터 빈 같은 바보 연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얼굴입니다.
칭찬인지 악담인지 애매한데, 저는 칭찬 쪽입니다.
실제로 오티스에게는 꽤 잘 맞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 캐릭터가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오티스가 상담하면서 좋은 말을 상당히 많이 합니다.
듣다 보면 꽤 괜찮은 문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크게 감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사는 좋은데 사람에게 힘이 부족한 느낌이랄까요.
처음에는 그걸 캐릭터의 단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말을 하는 주인공이라면 조금 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상담사라면 그 말에 조금 더 무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티스에게 무게가 없는 게 아니라,
오티스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겁니다.
성교육 드라마인데 주인공이 제일 모릅니다
오티스는 다른 사람 문제에는 답을 잘 찾습니다.
누군가의 불안이나 성적 고민을 들으면 그럴듯하게 정리합니다.
문제의 핵심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차례가 오면 엉망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솔직하지 못하고.
친구 관계를 망치기도 하고.
질투하고.
상처 주고.
자기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합니다.
이게 재미있습니다.
성교육을 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인데 정작 본인이 성과 사랑에 대해 가장 미숙합니다.
보통 이런 설정이라면 주인공을 일종의 현자로 만들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정답을 주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주인공 덕분에 성장합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오티스도 계속 틀립니다.
자기가 한 말과 다르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남에게는 건강한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관계는 망칩니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성교육이라는 게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식을 안다고 해서 자기 삶이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사람 마음이 이론대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성에 대해 많이 안다고 연애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관계에 대한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다고 자기 관계가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진짜 상담사는 오티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티스는 극 안의 사람들을 상담하지만,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건 드라마 자체입니다.
질리언 앤더슨은 등장부터 너무 강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제가 두 번째로 좋아했던 캐릭터는 오티스의 엄마 진입니다.
질리언 앤더슨.
《엑스파일》의 스컬리였던 그 배우입니다.
진으로 등장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전혀 다른 인물인데도 존재감부터 압도적입니다.
외모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그냥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순간순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화면에 들어오면 중심이 그쪽으로 가는 배우가 있잖아요.
질리언 앤더슨이 그렇습니다.
집안 곳곳에 성에 관한 물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고, 대화 역시 굉장히 직접적입니다.
아들 입장에서는 정말 죽을 맛일 것 같습니다.
엄마가 성 상담사인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 엄마가 매사에 그렇게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이라는 인물이 재미있는 건 전문가라고 해서 완벽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상담사이면서 엄마이고.
다른 사람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자기 관계에서는 흔들립니다.
여기도 같은 구조입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문가도 흔들립니다.
상담사도 틀립니다.
아이들도 실수합니다.
그래서 성이라는 소재를 다루는데도 의외로 훈계조가 아닙니다.
누군가 높은 곳에 올라가 정답을 내려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다들 각자 조금씩 모르는 채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메이브
제가 이 드라마를 틀게 만든 일등공신.
엠마 맥키가 연기한 메이브입니다.
오티스와 함께 상담 사업을 시작하고, 고객을 모으고, 돈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거칠고 매력적인 문제아 캐릭터 정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씩 안쪽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학교에서는 여러 소문이 따라다니고, 가정환경도 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선을 긋는 이유가 있고, 독하게 행동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배우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처음에는 마고 로비를 닮아서 눈이 갔는데 몇 편 지나면 더 이상 마고 로비 생각을 별로 하지 않게 됩니다.
메이브가 됩니다.
이게 배우의 힘인 것 같습니다.
닮은 얼굴 때문에 봤는데 결국 다른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엠마 맥키가 《바비》에 출연했고, 거기서 정말 마고 로비 옆에 섰습니다.
처음 이 배우를 보고 ‘마고 로비 닮았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걸 알고 꽤 재미있었습니다.
별것 아닌 이유로 시작한 인연이 묘한 방식으로 한 바퀴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노골적인데 이상하게 저속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사실 이 부분입니다.
성을 다룹니다.
아주 대놓고 다룹니다.
대사도 노골적입니다.
상황도 노골적입니다.
제목부터 성교육입니다.
당연히 성인 등급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속하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성을 소재로 내세우면 두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교과서적으로 만드는 것.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그 사이를 꽤 잘 갑니다.
웃길 때는 웃깁니다.
민망할 때는 대놓고 민망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고민 자체를 우스운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몸이나 취향이나 성적 정체성을 농담의 대상으로만 소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교육을 한다면 차라리 이런 드라마를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실제 교육 현장에서 그대로 틀기는 여러모로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성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꽤 괜찮았습니다.
숨기지도 않고.
과장해서 겁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가볍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사실 성만 이야기하는 드라마는 아닙니다
제목은 《Sex Education》이지만 보다 보면 이것이 단순히 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게 됩니다.
마약 문제도 나오고.
학교 폭력도 나오고.
성소수자에 대한 시선도 다루고.
낙태도 나오고.
리벤지 포르노 같은 문제도 등장합니다.
결국 성은 입구에 가깝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청소년들이 겪을 수 있는 온갖 문제들이 나옵니다.
정체성.
가족.
우정.
계급.
불안.
수치심.
사랑.
그리고 자기 몸에 대한 감정.
그러니 이 작품의 제목은 성교육이지만 실제로는 관계 교육에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관계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으니까요.
이런 문제들을 꽤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도 특정 인물에게 정답을 몰아주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조연들이 살아 있습니다
이런 류의 학원물이나 하이틴 드라마는 결국 조연이 중요합니다.
주인공 둘만 살아 있고 주변 인물들이 기능적으로 움직이면 금방 지루해집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그 점에서 꽤 강했습니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도 캐릭터가 분명합니다.
주인공과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와도 화면을 계속 보게 됩니다.
제가 미드나 영드를 오래 보는 기준 중 하나가 이겁니다.
캐릭터가 살아 있는가.
주연이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도 재미있는가.
이 작품은 적어도 초반에는 그게 됐습니다.
오티스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메이브가 나오면 메이브를 보고.
에릭이 나오면 에릭을 보고.
진이 나오면 또 진에게 시선이 갑니다.
사람마다 문제가 다르고,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래서 상담소라는 설정과 굉장히 잘 맞습니다.
상담소에는 원래 다양한 사람이 들어와야 하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영국 배우들의 발음도 좋았습니다.
특히 여배우들.
이건 내용과 별개인 취향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즌은 끝까지 못 봤습니다
시즌 1은 여덟 편을 그대로 봤습니다.
그 뒤 시즌도 계속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즌인 시즌 4에서 중간쯤 멈췄습니다.
처음 멈춘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였습니다.
특별히 너무 재미없다고 느껴서 끈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바빴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시간이 생겼는데도 다시 안 봤습니다.
이건 조금 다릅니다.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는 시간이 없어서 끊겨도 다시 돌아갑니다.
며칠 지나도 다음 이야기가 생각나고.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봅니다.
그런데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시즌 4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제 평가인 것 같습니다.
재미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닌데,
처음의 매력은 분명 많이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음 편을 누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마지막에는 다시 재생할 이유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상담이 끝났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캐릭터가 지겨워진 걸까.
이야기가 반복된 걸까.
시즌이 길어지면서 처음의 신선함이 사라진 걸까.
다 조금씩 맞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제일 편했습니다.
상담이 끝난 겁니다.
이 드라마가 저한테 해줄 상담은 이미 앞 시즌에서 대부분 끝났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문제가 계속 들어왔습니다.
보지 못했던 고민도 있었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선도 있었고, 꽤 재미있게 받아들일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상담소에 다시 갔는데 익숙한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느낌이 듭니다.
상담사가 나빠진 건 아닙니다.
상담소가 형편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가 거기서 받아올 것이 줄어든 겁니다.
상담이라는 건 원래 끝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평생 같은 상담실에 앉아 같은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즌을 끝까지 보지 않은 것이 꼭 작품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충분히 받았고,
충분히 봤고,
그러다 더 이상 찾아가지 않게 됐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은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시작은 정말 얄팍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이유는 하나같이 겉에 있었습니다.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미뤘습니다.
그러다 엠마 맥키가 마고 로비를 닮아서 틀었습니다.
배우의 얼굴.
영국 발음.
하이틴 분위기.
다 겉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억에 남은 건 다른 쪽이었습니다.
성을 웃음거리로만 소비하지 않는 태도.
정답을 아는 척하지 않는 방식.
남을 상담하는 사람이 자기 문제는 제일 못 푸는 정직함.
그리고 사람마다 자기 몸과 관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전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제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이상한 작품입니다.
겉을 보고 들어갔는데 속이 더 괜찮았습니다.
다만 그 속을 몇 시즌 동안 충분히 보고 나니 마지막에는 더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완주하지 않았는데도 크게 아쉽지는 않습니다.
상담소는 계속 열려 있었지만,
저는 더 이상 예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저를 문 앞까지 데려다놓은 배우는 몇 년 뒤 《바비》에서 정말 마고 로비 옆에 서 있었습니다.
마고 로비를 닮아서 시작한 드라마에서,
결국 마고 로비 옆에 선 배우까지 보게 됐습니다.
상담은 중간에 끝났는데,
시작한 이유만큼은 꽤 깔끔하게 회수됐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