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재미는 그냥 그런데 시간은 순삭입니다
안 멈추면 순삭이고, 멈추면 조금 어색합니다. 《킹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 멈추는 쪽을 선택한 드라마였습니다.
저는 좀비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비 드라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워킹데드》도 몇 편 보다 말았습니다. 재미있다는 사람은 정말 많은데 저는 이상하게 좀비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순간부터 관심이 급격하게 식습니다.
좀비라는 소재 자체가 싫다기보다 그걸 오래 보고 있는 게 지칩니다.
쫓기고.
도망가고.
다시 쫓기고.
물리고.
또 살아남고.
처음에는 긴장되는데 몇 번 반복되면 좀비보다 제가 먼저 지칩니다.
그래도 화제가 되는 좀비 영화는 가끔 봅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본 좀비물을 하나 고르라면 《부산행》입니다.
공유, 정유미, 마동석이 나왔던 그 영화.
좁은 열차 안에서 계속 앞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단순한 구조가 좋았고, 좀비보다 사람 사이의 긴장도 꽤 잘 살아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킹덤》은 꽤 오랫동안 안 봤습니다.
김은희 작가 작품을 좋아하는데도 그랬습니다.
넷플릭스에서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를 처음 내놓았다고 떠들썩했고, 기사도 많이 나왔지만 저는 의연하게 지나갔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좀비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자막 없이 편하게 몰아서 볼 한국 드라마를 찾다가,
그냥 이것도 한번 볼까.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시즌 1을 봤고.
시즌 2도 봤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었느냐고요.
음.
그냥 그랬습니다.
시즌 1도 그랬고.
시즌 2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시간은 정말 빨리 갑니다.
재미는 그냥 그런데 시간이 사라집니다
《킹덤》은 시즌당 6부작입니다.
한 회도 아주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작하면 금방 끝납니다.
실제로 봐도 그렇습니다.
한 편 끝나고.
다음 편.
또 다음 편.
잠깐 본 것 같은데 시즌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헷갈렸습니다.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다고 하기엔 별로 남는 게 없고.
재미가 없다기엔 또 멈추지 않고 계속 봤습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둘을 따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와 속도는 같은 게 아닙니다.
재미있는 작품이 항상 빠른 것도 아니고,
빠른 작품이 반드시 재미있는 것도 아닙니다.
《킹덤》은 그 둘 가운데 속도 쪽에 아주 강하게 걸쳐 있습니다.
저에게는 재미가 속도를 만든 게 아니라,
속도가 재미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 차이가 꽤 중요합니다.
이 드라마는 계속 다음 장면으로 갑니다
《킹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왕이 이상해졌고.
궁 안에서는 권력을 두고 싸웁니다.
세자는 살아남아야 하고.
역병이 퍼집니다.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 도망가거나 싸워야 합니다.
큰 줄기만 적으면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직선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순함도 의도적인 선택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드라마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아서 관객을 붙잡지 않습니다.
멈추지 않는 걸로 붙잡습니다.
설명하다가 오래 쉬지 않고.
인물 하나의 과거를 몇 회씩 들여다보지도 않고.
뭔가 터지면 바로 다음 사건으로 갑니다.
심지어 중요해 보이는 인물도 꽤 쉽게 죽습니다.
이걸 보면서 《왕좌의 게임》 생각도 조금 났습니다.
설정이나 캐릭터 일부에서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도 있지만, 특히
‘이 사람은 꽤 중요하겠는데?’
싶은 인물을 별 망설임 없이 치워버리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보통 인물이 오래 살아남으면 사연이 붙습니다.
과거를 설명하고.
관계가 생기고.
감정을 쌓습니다.
그러면 드라마는 잠시 멈춰서 그 사람을 봐야 합니다.
《킹덤》은 그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물에게 너무 오래 머물기보다 사건을 계속 앞으로 밀어냅니다.
필요하면 죽이고 다음으로 갑니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시즌당 6부라는 짧은 분량도 단순히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못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못 담은 게 아니라,
애초에 많이 담으려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이 담으면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면 느려지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그랬다’는 조금 이상한 평가입니다
제가 《킹덤》을 보고 “그냥 그랬다”고 말하면 보통은 별로였다는 뜻처럼 들릴 겁니다.
그런데 정확히는 조금 다릅니다.
아주 재미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는지 없는지 충분히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한 장면이 끝나면 다음 장면이 오고.
좀비를 피하면 정치 싸움이 나오고.
정치 싸움이 잠잠해지면 다시 역병이 옵니다.
그 사이에 다음 회 버튼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또 누릅니다.
이걸 반복하다 보면 시즌이 끝납니다.
다 보고 나서야,
“그래서 나 이거 재미있게 본 건가?”
하게 됩니다.
조금 웃긴 일입니다.
보통 정말 재미있는 작품은 보는 동안 재미있다는 걸 압니다.
좋은 장면이 나오면 감탄하고.
배우에게 빠지고.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킹덤》은 생각보다 그런 순간이 적었습니다.
대신 계속 봤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이 드라마가 약간 놀이기구 같습니다.
타고 있을 때는 정신이 없습니다.
빠릅니다.
다 끝나고 내려왔는데,
“그래서 풍경이 어땠지?”
하면 별로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없었다고 하기도 애매합니다.
어쨌든 끝까지 탔으니까요.
문제는 멈출 때입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약점은 속도가 잠깐 끊기는 순간에 꽤 잘 보였습니다.
가장 먼저 걸렸던 건 주지훈의 연기였습니다.
특히 좀비가 몰려오는 장면에서 입을 벌리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모습.
이게 이상하게 계속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번 눈에 띄기 시작하니까 다음에도 보입니다.
좀비가 온다.
세자가 놀란다.
숨을 크게 쉰다.
저는 갑자기 배우를 봅니다.
그전까지는 캐릭터와 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그 몇 초 동안,
‘지금 주지훈이 긴장한 연기를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순간 몰입이 깨집니다.
왜 유독 그 장면들이 거슬렸을까 생각해보니 이것도 속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킹덤》은 대부분 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뛰고.
좀비들이 뛰고.
칼을 휘두르고.
문을 닫고.
말을 타고.
누군가 죽습니다.
카메라도 다음 장면으로 빠르게 갑니다.
그런데 좀비가 밀려드는 순간 가끔 카메라가 세자의 얼굴 앞에서 멈춥니다.
그리고 배우가 공포를 보여줘야 합니다.
드라마가 처음으로 몇 초 동안 사람의 얼굴 하나를 견뎌야 하는 순간입니다.
저는 그 순간이 어색했습니다.
달리고 있을 때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들이 멈추면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지훈뿐 아니라 작품 전체에서도 가끔 완벽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던 지점을 되짚어보면 대부분 비슷합니다.
속도가 늦어진 자리였습니다.
달릴 때는 무섭고, 서 있으면 좀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조금 못된 결론 하나가 나왔습니다.
《킹덤》은 좀비를 닮았습니다.
달릴 때는 무섭습니다.
서 있으면 조금 그렇습니다.
좀비들도 떼로 미친 듯이 달려오면 상당히 무섭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밝은 데 세워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분장부터 보일 수도 있습니다.
《킹덤》도 비슷합니다.
전개가 빠를 때는 굉장히 그럴듯합니다.
조선 시대.
궁중 권력 싸움.
역병.
굶주린 백성.
언데드.
이 조합이 엄청난 힘으로 밀고 옵니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좀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그림 자체도 신선합니다.
그런데 가끔 작품이 멈춰서 인물이나 감정을 오래 들여다보면,
‘어, 생각보다 단순하네.’
하는 순간이 옵니다.
저한테는 그 차이가 꽤 컸습니다.
그래서 《킹덤》의 빠른 전개는 장점인 동시에 일종의 방어막처럼 느껴졌습니다.
빠르니까 재미있기도 하지만,
빠르니까 약점이 오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훨씬 영리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비보다 이야기는 훨씬 단순합니다
김은희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더 복잡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킹덤》은 의외로 아주 단순하게 움직입니다.
누가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지 분명하고.
누가 살아남아야 하는지 분명하고.
역병의 위험도 명확합니다.
그래서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복잡한 정치극과 좀비물의 결합이라고 생각하면 무거울 것 같은데 실제로는 꽤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정주행에 도움이 됩니다.
한 회 놓쳤다고 인물 관계를 다시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현재 누가 누구를 죽이려 하는지만 알면 됩니다.
그리고 곧 좀비가 옵니다.
사람 사이의 정치가 너무 복잡해질 만하면 좀비가 한번 싹 정리합니다.
효율적입니다.
아주 효율적입니다.
가끔은 드라마가 직접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정치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늘어지겠다.’
그러면 좀비가 옵니다.
좀비가 참 성실합니다.
그래도 하루 정주행용으로는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아주 높게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 짧게 몰아볼 작품을 찾는다면 추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막 없이 편하게 볼 한국 드라마.
시즌이 너무 길지 않은 작품.
전개가 빠른 작품.
이런 걸 찾는다면 좋습니다.
하루를 잡고 달리기에 딱 좋은 길이입니다.
시즌 하나가 6부라 부담도 적습니다.
한 편만 보겠다고 틀었다가 다 보기도 쉽습니다.
다만 “인생 드라마가 될 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아니었습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시간만큼 강한 감정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이 작품을 두고 재미있었다고 해야 할지 조금 애매합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잘 넘어갑니다.
아주 잘 넘어갑니다.
드라마에도 목 넘김이라는 게 있다면 이 작품은 상당히 좋습니다.
맛은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 계속 넘어갔습니다.
마지막에 전지현이 나옵니다
시즌 2 마지막에는 꽤 노골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냅니다.
전지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안재홍도 나옵니다.
처음 봤을 때는 당연히 시즌 3을 위한 포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실제로 이후 전지현이 중심에 있는 《킹덤: 아신전》이 따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편 시즌 3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 드라마의 성격을 생각하면 조금 웃깁니다.
《킹덤》은 그렇게나 멈추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가고.
나라가 망할 것 같아도 가고.
좀비가 밀려와도 갑니다.
한 장면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런 작품이 시즌 2 마지막에서 멈췄습니다.
몇 년째요.
봄은 이미 왔습니다
시즌 2에서 서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면 역병도 끝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즌 2가 공개됐던 시기를 생각하면 묘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대사였습니다.
현실에서도 전염병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으니까요.
당시에는 드라마가 현실을 예언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봄은 여러 번 왔습니다.
현실의 역병도 일상을 완전히 멈춰 세우던 시기를 지나갔습니다.
《킹덤: 아신전》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시즌 3는 아직 없습니다.
조금 아이러니합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멈추지 않는 거였는데,
결국 가장 오래 멈춰 있는 한국 드라마 중 하나가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킹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시즌 1이나 시즌 2의 사건보다 이 멈춤이 더 기억납니다.
재미가 아주 강했던 것도 아니고.
캐릭터에 깊게 빠진 것도 아닌데.
시간은 정말 빨리 갔습니다.
그게 《킹덤》이었습니다.
달리는 동안에는 생각할 틈을 안 줍니다.
그리고 멈춘 뒤에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거, 정말 재미있었던 건가?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즌 3가 나온다고 하면 저는 아마 또 볼 겁니다.
속도가 어떤지 확인하려고요.
좀비도 오래 쉬었으니 이제 다시 뛸 때가 됐습니다.
봄은 진작 왔습니다.
이 글은 볼까pick 운영자의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입니다. 작품 페이지의 「호불호 정리」는 찬반 양쪽을 균형 있게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칼럼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